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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우경임 논설위원입니다.

wooha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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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7~2025-01-16
칼럼100%
  • [횡설수설/우경임]무식하면 용감하다?… ‘더닝 크루거’ 한국 사회

    ‘더닝 크루거 효과’는 ‘무식하면 용감하다’로 요약하면 딱 들어맞는다. 미국 사회심리학자 데이비드 더닝과 저스틴 크루거의 성을 딴 심리학 용어로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더닝과 크루거는 논문을 발표한 이듬해인 2000년 괴짜들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이그 노벨상을 받았다. 다소 익살스럽게 받아들여졌던 이들의 연구 결과는 알고리즘에 갇혀 정보 편식이 심각해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대가 열리면서 더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사회및성격심리학회는 올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회심리 현상으로 더닝 크루거 효과를 꼽았다. ▷더닝과 크루거는 미국 코넬대 대학생을 대상으로 간단한 시험을 치르게 하고 절대적 점수와 상대적 석차를 측정했다. 그 결과, 가장 점수가 낮은 집단(하위 25%)이 실제 점수와 석차보다 자신을 가장 높게 평가하더라는 것이다. 이 집단은 평균 9.6개를 맞혔지만 14.2개를 맞혔다고 생각했다. 백분율로 환산하면 이들의 평균 석차는 88등이었지만 스스로를 32등으로 평가했다.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얘기다. 가장 점수가 높은 집단(상위 25%)은 평균 14등이었지만 32등으로 평가해 그 반대였다. ▷시험을 잘 봤다고 으쓱하며 돌아온 아이의 성적이 처참하거나, 주식 초보자가 몰빵 투자하는 이유다. 문제는 SNS 시대가 도래하며 더닝 크루거 효과가 개인의 실패를 넘어 사회의 실패를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필터링된 편향된 정보만 보는 ‘필터 버블’과 더닝 크루거 효과가 결합하면 허위 정보나 음모론에 쉽게 빠져든다. 음모론이 증폭될수록 사회는 극단으로 분열되고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이 자라난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트럼프 정부가 한국 부정선거를 파헤친다” “선거 조작범으로 중국공산당 요원을 체포했다” 등의 거짓 주장을 펼치는 극우 유튜버가 극성을 부린다. 이들의 황당한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보수 성향 고령층만이 아니다. 구독자 20만 명 이상 극우 유튜브 시청자를 분석해 보니 10∼30대가 50∼80대보다 많이 봤다. 학력이나 경력도 상관없다. 중국의 선거 개입을 믿는 일부 교수들이 중국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열고, 퇴직공무원이라는 사람들이 모여 부정선거 단죄를 주장한다. ▷더닝 크루거 효과는 무지하고 무능할수록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메타인지 능력이 떨어지고, 결과적으로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를 피하려면 충분히 공부하고, 그 지식을 의심하며, 다른 의견에 열려 있어야 한다. “유튜브를 통해 애쓰시는 모습을 보고 있다”며 극우 유튜브의 열혈 애청자임을 자인한 윤 대통령의 시대착오적인 비상계엄도 더닝 크루거 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 지도자의 지적 게으름이 나라를 위험에 빠뜨렸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5-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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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요 초대석]“무안공항 참사는 기술 재난… 국토부 조사위 참여, 분열의 씨앗 뿌린 격”

    《과학사를 가르치던 홍성욱 서울대 교수는 2011년부터 대형 재난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계기였다. 늦둥이 아이가 돌 무렵이던 2010년 겨울, 가습기 살균제 ‘세퓨’를 사용했다. 이듬해부터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아이가 기침만 해도 불안감이 엄습해 덜덜 떨렸고, ‘왜 과학자인 나조차 위험을 알지 못했나’라는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홍 교수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지난해 두 권의 책으로 펴냈다. 우리 사회의 대형 사고를 기술 재난으로 정의한 ‘우리는 재난을 모른다’와 참사가 반복되는 이유를 추적한 ‘대한민국 재난의 탄생’이 그것이다. 가습기 청소를 열심히 하지 않아 아이는 무사했지만,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그 후로도 재난이 끊이질 않았다.》―대구 지하철, 가습기 살균제, 세월호 참사 등을 기술 재난으로 정의했다. 기술 재난은 자연 재난과 무엇이 다른가. “자연 재난은 봄 가뭄, 여름 홍수처럼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하늘 탓밖에 할 수 없으니 재난 복구 과정에서 공동체가 끈끈해지기도 한다. 기술 재난은 이와 정반대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 재발을 막기 위해 화학 물질을 규제했지만 배가 가라앉고 비행기가 추락했다. 예측 불가능하다. 사람이 만들고 운용했던 기술로 발생한 기술 재난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런데 기술의 복잡성으로 그 책임 소재와 사고 원인을 명확히 밝히기 어렵고, 그 결과 공동체에 균열이 일어난다.” ―지난해 12월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는 기술 재난인가. “사고조사위원회 보고서가 나오지 않았고, 블랙박스도 해독되지 않아 속단하기 어렵지만 전형적인 기술 재난으로 보인다. 기술 재난을 설명하는 이론 중에 ‘스위스 치즈 모델’이 있다. 구멍이 숭숭 뚫린 스위스 치즈를 쌓을 때 구멍 하나가 일렬로 맞는 드문 순간이 있다. 서로 연관성이 없고, 사고 확률이 낮은 취약성이 결합하는 순간 대형 사고나 재난이 발생하는 것을 이에 빗댄 것이다. 철새 도래지에 지어진 공항, 조류 충돌 예방 시설이나 인력이 부족했던 상황, 로컬라이저(방향 안내 시설)가 설치된 콘크리트 둔덕 등 구조적인 취약성이 결합한 순간, 179명 사망이라는 비극을 낳았다.” ―조류 충돌이 일차적인 원인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영국 히스로 공항처럼 외국에선 인근 호수에 ‘셰이드볼’(Shade Ball·검은색 플라스틱 공)을 뿌려둔다. 새 떼가 앉지 못하도록 해 쫓아내는 역할을 한다. 무안공항 인근은 철새 보호 지역이라 가장 간단한 ‘셰이드볼’ 방법을 쓰지 못했다. 그렇다면 조류 충돌 예방 인력이라도 충분했어야 한다. 사고 당시 현장 근무 인력은 1명뿐이었다고 한다. 적자 공항이라 인력을 줄였는데 근무 시간을 무작정 늘릴 순 없으니 최소한의 인력만 투입됐을 것이다. 법령 위반은 아니라지만 로컬라이저가 안전 구역에서 몇 m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고, 더구나 콘크리트 둔덕이었다. 조류와 충돌했다고 반드시 이런 참사로 이어지진 않는다. 기술적인 취약성에 인적 오류가 결합해 벌어진 참사다.” ―공항 설계나 여객기 결함 같은 기술적 오류에 힘이 실리는데…. 어떤 인적 오류가 있었나. “조류 충돌은 무안공항에서 6년간 10번 있었다. 자꾸 반복되니 ‘별일 아닌가’라며 무시하는 ‘일탈의 정상화’가 발생했거나, 이를 위험 신호로 인식하는 문제를 제기했으나 윗선에서 묵살됐을 가능성이 있다. 당초 환경 단체에서 철새 도래지라는 이유로 공항 위치로 부적합하다고도 했다. 인간의 사소한 부주의가 기술적 오류와 결합하면 재앙적인 참사가 발생한다.” ―기술 재난은 그 피해도 크지만 회복 과정에서 공동체를 분열시킨다고 했다. “일본의 이타이이타이병, 한국의 가습기 살균제 참사처럼 피해를 입증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느린 재난’이 특히 그렇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 초기 옥시 등 기업에서 전문가를 고용해 살균제 성분의 유해성을 반박하는 보고서를 냈다. 법원이 해당 보고서를 채택하며 재판이 중단된 적이 있다. 그사이 기업은 합의금을 제안하며 무마하려고 했고, 이는 유가족 사이를 갈가리 찢어 놓았다. 자식을 잃은 참척의 고통, 내 손으로 살균제를 샀다는 죄책감, 거대 기업과 싸우는 무력감에 시달리던 피해자 공동체가 완전히 파괴됐다. 온 국민이 애도했던 세월호 참사는 정권의 안위라는 정치적 이슈로 번지면서 우리 사회가 아직도 갈등하고 있다. 다만, 무안공항 참사는 그런 징후가 덜한 것 같다. 국가 기관이 혐오 발언에 대한 무관용 원칙을 밝혔고, 포털 댓글 창에도 주의를 당부하는 경고가 바로 떴다. 과거 참사를 통해 우리 사회가 성숙해진 것 아닐까. 비상계엄 정국이 이슈 블랙홀이 된 이유도 있는 것 같다.” ―기술 재난이 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한다면, 어떻게 막을 수 있나. “피해자가 신뢰할 수 있는 사고조사위원회가 꾸려지는 것이 첫걸음이다. 유가족에게 공정하다고 믿음을 줄 수 있는 외부 전문가로 꾸려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번 무안 제주항공 사고조사위원회에 국토교통부가 당연직으로 참여하는데 이는 분열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우려스럽다. 로컬라이저만 해도 국토부는 안전 구역 밖이므로 규정 위반은 아니라고 한다. 반면, 외국 전문가는 공항에 있어선 안 될 콘크리트 설치물이라고 한다. 이런데 유가족이 사고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수긍할 수 있겠나.” ―역대 참사의 조사가 실패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사고조사위원회는 사고가 왜 일어났고, 구조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있었고,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 하나의 서사를 만들어 내놓고 우리 사회가 그 서사를 공유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는 10년 동안 조사가 이뤄졌지만 내력설, 외력설을 반박할 기술적 분석, 책임의 크기를 가리는 사법적 판단에만 치우쳐 납득할 만한 서사를 완성하지 못했다. 그러니 음모론이 자꾸 창궐한다.” ―검경도 수사를 하지 않았나. “세월호는 사고 원인이 전부 밝혀지기 전에 재판이 끝나버렸다. 나중에 해경의 윗선에도 책임이 있을 법한 그런 증거들이 등장하는데도 일사부재리 원칙으로 처벌하지 못했다. 조사보다 수사가 앞서다 보니 형사 처벌만 피하면 결백하다고 생각한다. 도덕적 책임,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제도적인 변화로도 이어지지 않는다. 대형 참사가 반복되는 이유라고 본다.” ―세월호 참사를 예로 우리 사회가 공유할 서사를 만들어 본다면…. “세월호는 구조 변경으로 복원성이 취약한 배였는데 과적을 하고 출항했다. 고박이 풀린 화물이 쏟아지면서 배가 45도 기울었고 환기구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닫혀 있어야 할 수밀문까지 열려 있어서 1시간 반 만에 배가 90도로 기울었다. 선장과 선원들은 먼저 도망쳤다. 그 바람에 배에 대한 정보와 대형선 구조 경험이 없던 해경은 밧줄을 던지고 구명보트를 띄워 배에서 탈출한 사람만 건져 올렸다. 이에 앞서 뇌물을 받고 운항 허가를 내준 관리·감독기관, 배가 자꾸 기운다는 선원들의 보고를 무시한 선사, 구조 시간이 충분할 것으로 안일하게 판단한 해경 등이 있었다. 그간 축적된 연구를 통해 만들어진 서사이지만 우리 사회가 얼마나 동의할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 이를 공유하지 못하면 우리는 304명이 희생된 참혹한 재난으로부터 아무 교훈도 얻지 못한다.” ―기술 재난을 예방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기술 재난의 특징은 ‘책임의 파편화’ ‘조직된 무책임’으로 설명된다. 거대한 관료제와 복잡한 기술 체계를 따라가다 보면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기 힘든 상황이 벌어진다. 내 할 일만 또박또박 하는 게 아니라 내 주변에 구조적인 취약성이 있는지 민감성을 갖고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징조가 보고됐을 때 경청하는 조직 문화도 중요하다. 가습기 살균제만 해도 ‘써 보니까 목이 아프고 이상하다’는 소비자 불만이 접수됐고, 연구 기관에서 ‘살생 물질은 따로 다뤄야 한다’는 제안이 있었다고 한다.” ―참사를 겪은 공동체의 회복을 도우려면 어떻게 애도해야 하나. “참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모순적이다. 무안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에서 보듯이 참사가 발생하면 누구보다 슬퍼하고, 돕고 싶어 한다. 하지만 누구보다 잊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성수대교 추모비는 강변북로 아래 숨겨져 있고, 대구 지하철 추모 공원은 시민안전테마파크로 운영된다. 가습기 살균제, 세월호, 코로나19 팬데믹 등과 관련한 제대로 된 백서도 없다. 추모비나 추모 공원처럼 영속적인 시설을 만들고, 추모제처럼 희생자의 넋을 기리며 서로 연대하는 의식이 필요하다. 기술재난연구센터 같은 공신력 있는 기구를 만드는 것도 제안한다. 이번 사고로 전국에 있는 로컬라이저를 점검하고, 단단한 구조물을 제거한다고 한다. 살아남은 사람은 죽은 사람의 희생에 빚을 진 채 조금 더 안전해진 세상에 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재난을 모른다’는 이렇게 끝난다. ‘우리가 과거보다 조금 더 안전한 세상에 살고 있다면, 그것은 재난 생존자와 유가족의 힘든 싸움이 열매를 맺었기 때문일 것이다. 재난을 직접 겪었든 겪지 않았든 우리 모두는 재난 공동체다.’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64)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과학사 및 과학철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를 거쳐 2003년부터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3∼2015년 한국과학사학회장을 지냈고 현재 ‘과학기술과 사회 네트워크’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과학기술학의 시각에서 한국 사회의 재난을 연구한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5-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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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3년 지나서야… 숙대 “김건희 석사 논문 표절”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는 1999년 숙명여대 교육대학원에서 미술교육 석사 학위를 받았다. 석사 논문은 ‘파울 클레의 회화의 특성에 관한 연구’다. 독일 청기사파 화가인 클레의 작품 세계를 분석했다. 숙명여대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가 이 논문의 표절 의혹이 제기되고 검증에 착수한 지 3년 만에 표절이라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작가 연보, 첨부된 그림, 참고 문헌을 제외하면 43쪽에 불과한 짧은 논문이다. 그런데도 이 논문 검증에 석사 논문을 하나 새로 쓰고도 남을 시간이 걸렸다. ▷김 여사 석사 논문 표절 의혹은 2021년 12월 윤 대통령이 국민의힘 대선 주자일 당시 처음 제기됐다. 그 이후 숙명여대 민주동문회가 자체 검증한 바에 따르면, 해당 논문의 표절률은 48.1∼54.9%였다. ‘제노바에서는 난생처음으로 보는 바다와 항구에 감동했고…’ ‘이탈리아 여행은 클레에게 뮌헨에서의 3년간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했다’ 등처럼 다른 논문, 저서와 6개 단어가 연속으로 일치하거나 동일한 내용인데 단어만 살짝 바꿔치기한 경우들이다. 이런 내용이 과연 학술적 가치가 있는지 의심스러운데 이조차 남의 글을 베꼈다는 것이다. ▷숙명여대는 2022년 2월 예비조사를 거쳐 그해 12월 본조사에 착수했다. 규정상 석 달 안에 조사 결과가 나와야 하지만 두 해가 지나도록 감감이었다. 학생, 동문이 나서서 조사를 촉구했지만 정부가 대학의 돈줄을 꽉 틀어쥔 상황에서 시퍼런 권력자의 심기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나 보다. 지난해 9월 김 여사 논문 검증을 공약한 신임 총장이 취임하고서야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가 새로 구성됐고, 석 달 만에 표절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야….” 냉소적인 반응이 나오지만 숙명여대는 국민대에 비하면 그나마 체면을 덜 구겼다. 김 여사는 숙명여대 석사에 이어 2008년 국민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에서 디자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박사 과정 중에 발표한 논문 ‘온라인 운세 콘텐츠 이용자들의 이용 만족과 불만족에 따른 회원 유지와 탈퇴에 관한 연구’는 ‘회원 유지’를 ‘member Yuji’로 엉터리 번역해 함량 미달 논란을 불렀다. 박사 학위 논문인 ‘아바타를 이용한 운세 콘텐츠 개발 연구’는 점집 블로그 등을 출처 표기 없이 그대로 복사해 붙여 넣은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국민대는 2022년 8월 관행이었다는 취지로 이들 논문이 표절이 아니라고 봤다. ▷김 여사는 짜깁기 석·박사 학위를 바탕으로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등 경력을 이어왔다. 하지만 실수였다고 강변했을 뿐, 학문적 양심에 반한 행위였다는 반성은 없었다. 정직성, 성실성은 최소한의 연구 윤리이다. 학위만 수집했을 뿐, 윤리적 책임감을 배우지 못한 것이 오늘의 비극을 낳았을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5-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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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12·14 여의도 집회는 일상을 되돌려달라는 외침이었다

    12월 14일 오후 5시경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순간. 국회의사당부터 여의도역까지 의사당대로를 꽉 메운 시민들 사이에선 일제히 “와”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곧바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떼창이 시작됐다. ‘좋지 아니한가’ ‘삐딱하게’ 등 이른바 탄핵 플레이리스트에 맞춰 머리 희끗한 어른도, 반짝이는 응원봉을 든 20대도 함께 춤을 췄다. 그건 45년 전으로의 역사적 퇴행을 막아 냈다는 안도감이었다. ▷1987년 민주화로부터 이제 37년이 지났다. 민주주의 역사가 짧기에 3일 한밤 비상계엄과 같은 반동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간 민주주의로 단련된 시민들의 수준은 달랐다. 지하철 여의도역 출구를 나오자 앳된 학생들이 수줍게 “추운데 가져가세요”라며 핫팩을 나눠줬다. 자칫 사고 우려가 있을 만큼 인파로 가득했지만 시민들은 침착했다. 서로 밀칠까 조심하며 걸었고, 너무 밀집돼 위험하다 싶으면 누군가 나서 “2줄로 가요” “유모차 있으니 비켜주세요”라고 교통정리를 했다. ▷커피나 빵이 선결제된 카페에선 시민들이 몸을 녹였다. 인근 빌딩들은 화장실을 개방했다. 2020년 5월 미국에서 경찰 폭력에 목숨을 잃은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촉발된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가 한창일 당시 뉴욕 등 주요 도시 상점이 약탈당했던 것과 비교된다. 그래서 상점은 시위가 예정된 날이면 나무판자를 덧대 아예 봉쇄했다. 외신들이 K팝 콘서트 같은 한국의 시위 문화를 주목하는 이유다. ▷이날 탄핵 집회에선 해학이 가득 담긴 깃발이 곳곳에서 나부꼈다. ‘제발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사람들’은 무언가 행동해야 한다는 데 슬퍼하며, ‘고주망태 연합’은 나라 걱정 없이 술 마시고 싶어서 나왔다고 했다. ‘고혈압약 어버이 연합’은 혈압이 올라서, ‘갱년기 연합’은 열불이 나서 집회에 참여했다. ‘통영 아기들 보호단’은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겠다는 엄마들이 뭉쳤다. ‘화병 걸린 TK(대구 경북) 딸내미 연합’과 ‘부모님 몰래 시위 나온 PK(부산 경남) 청년 연합’도 있었다. ▷시민들이 자체 제작한 깃발을 들고나오는 건 어느 단체에 정치적으로 동원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집회에 참여했다는 의사 표시 방법이다. 이들 깃발의 공통된 주장은 단 한 가지, 일상을 되돌려 달란 것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식 비상계엄으로 불안에 떨지도, 가족과 친구의 안위를 걱정하지도, 존엄할 권리를 위협받지도 않는 ‘보통의 하루’를 되찾고 싶다고 했다. 시민들은 한밤 계엄 선포를 막기 위해 국회로 달려 나오는 용기를 보였고, 질서정연한 평화 시위로 탄핵을 이끌어 냈다. 우리는 2024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수준과 시민의식에 맞는 그런 대통령을 가질 자격이 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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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올해의 사자성어 ‘도량발호’

    2024년 한 해를 성찰하는 사자성어로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며 함부로 날뛴다는 뜻의 ‘도량발호(跳梁跋扈)’가 선정됐다. 도량은 살쾡이가 껑충거리며 이리저리 날뛰는 모습을 뜻한다. 장자의 ‘소요유’ 편에 나오는 문구라고 한다. 발호는 한자 그대로 풀면 물고기가 통발을 뛰어넘는다는 뜻이다. 중국 한나라 때 권력을 장악했던 외척 양기를 ‘발호장군’이라 일컬은 데서 나온 말이다. 오만방자한 권력을 풍자한 것이다. 도량발호는 두 단어를 합친 ‘신(新)사자성어’인 셈이다. ▷교수신문은 2001년부터 매년 전국 대학교수 대상 설문조사를 통해 올해의 사자성어를 뽑아 왔다. 올해는 한밤 비상계엄이 선포되기 전날인 2일까지 진행됐다. ‘도량발호’를 선택한 이유로 교수들은 그간 국민 위에 군림만 하려는 듯한 윤석열 대통령의 행태를 꼽았다. 부인의 명품백 수수를 “박절하지 못해서”라고 감싼 것을 비롯해 갑작스러운 의대 증원 2000명 발표, ‘런종섭’ 논란 등 일반 상식과는 동떨어진 잇단 독선과 실책으로 총선에 패배하고도 국회를 무시한 채 ‘마이 웨이’를 고수해 온 현 정권을 향해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며 함부로 날뛴다’고 꼬집은 것이다. ▷다수의 교수들이 도량발호로 의견을 모은 다음 날인 3일 윤 대통령은 느닷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도량발호가 교수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은 것이다. 이번엔 영부인 보호 등을 위한 권력 남용에 그친 것이 아니라 군(軍)을 포함해 아예 국가 시스템을 망가뜨리는 수준까지 치달았다. 국가 안보와 국민 안전을 지켜야 할 군과 경찰이 국회에 침투하고, 정치인을 체포하며,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점거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 후유증을 어찌 감당할지, 어떻게 국가 시스템을 복원해야 할지 암담하다. ▷교수들이 뽑은 다른 사자성어들도 어지러운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2위인 ‘후안무치(厚顔無恥)’는 낯짝이 두꺼워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이다. 여야 정치인들이 잘못에 대해 부끄러움을 모르고, 이에 따라 수치를 모르는 세태가 만연하다는 것이다. 3위를 차지한 ‘석서위려(碩鼠危旅)’는 머리가 크고 유식한 척하는 쥐 한 마리가 국가를 어지럽힌다는 뜻이다. 자신이 똑똑하다고 믿는 지도자들 때문에 우리 사회가 끊임없는 갈등으로 점철된 시간을 보냈다는 안타까움을 담은 표현이라고 한다. ▷역대 사자성어는 무도한 권력에 대한 경고음을 꾸준히 울렸으나 권력에 취한 어느 대통령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2022년에는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다는 뜻의 ‘과이불개(過而不改)’, 이듬해는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는다는 뜻의 ‘견리망의(見利忘義)’가 선택됐다. 이런 민심을 읽고 조금이라도 겸손했다면 어땠을까.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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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우경임]1980년 ‘서울의 봄’과 2024년 ‘서울의 밤’

    아이가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을 보고 온 날. 실화를 각색했다고 알려주며 ‘검문’ ‘금서’ 같은 기억 조각을 꺼내 5공화국 당시 사회적 상황을 들려줬다. “진짜야?” 돌아온 반응이었다. 2024년 한국에 사는 아이로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민주주의가 성공적으로 이식된 세계 10대 경제 강국에서 태어났다. 세계인과 ‘K팝’ ‘K드라마’를 함께 듣고 보고, 노벨 문학상 수상작을 모국어로 읽는 문화적으로 융성한 나라에서 살고 있다. 아이가 그런 나라에서 자유를 누리고 존엄을 지키며 산다는 건 뿌듯한 일이었다. 그런데 12월 3일부터 아이와 나는 45년의 세월을 거슬러 같은 경험을 공유하게 됐다.낡은 흑백 필름이 돌아갔지만 3일 밤 시대착오적인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해제되기까지 6시간은 ‘서울의 봄’을 다시 보는 듯했다. ‘서울의 봄’에 빗대 ‘서울의 밤’이라 불리는 이날, 총을 든 군인이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 들이닥쳤다. 하지만 ‘서울의 봄’과 ‘서울의 밤’은 분명히 달랐다. 역사적 퇴행의 순간이라는 건 같지만, 우리 민주주의 성숙도는 달랐다. 이날 밤 11시 48분 국회 경내에는 헬기를 타고 무장한 계엄군들이 투입됐다. 707특수임무단, 제1공수특전여단, 특수작전항공단, 수도방위사령부 소속 280명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국회 유리창을 부수고 창문을 넘어 경내에 진입했으나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서는 의원들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 현장에 있던 군인들의 해태(懈怠) 아니고는 이 상황을 설명하기 어렵지 않을까. 이들은 흥분한 시민을 달래기도 했고, 다칠까 조심하며 움직였다. 길을 터준 시민들에겐 경례로 감사 인사를 하거나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며 퇴각했다. 이를 두고 비상계엄이 “야당에 대한 경고용이었지, 실제 국회를 장악하려 했던 것은 아니라는 증거”라는 어이없는 변명이 흘러나온다. 실패를 상정하고 무장 군인을 국회로 보냈을 리 없다. 적이 아닌 국민과 싸우라는 부당한 지시에 대한 저항이었든지, 명분 없는 비상계엄에 따른 후과가 두려웠든지 간에 민주적 사고가 훈련된 청년들의 상식적인 판단이 반영됐을 것이다. 민주주의에 흠뻑 젖어 자란 세대다. 대학가에서는 비상계엄의 초법적, 위헌적 행위를 지적하는 시국 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연세대는 4일 “비상계엄은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배신 행위”라 했고 고려대는 “자유민주주의를 전복하고자 한 반국가 세력이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서울대는 “국가 권력이 민주주의 가치를 지키지 않는다면 기꺼이 권력에 저항할 것”이라고 했다. 교과서에서 봤을 법한 비상계엄을 두고 이들은 교과서대로 저항하고 있다.민주주의를 배신한 건 윤 대통령 우리 역사에서 ‘서울의 봄’과 ‘서울의 밤’이 다시 반복될 수도 있다. 그래도 낙관하는 건 “돌아가라”며 계엄군을 막아선 시민들과 즉각 본회의를 소집한 국회가 보여준 우리 민주주의의 회복력이다. 한편으론 비관한다.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정당성 없는 대통령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선거로 선출한 대통령에 의해 자행됐다는 점에서다.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보여준다. 슬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응당한 책임을 물어 교훈을 남겨야 할 것이다. 오로지 대통령 자신의 정치적 위기 타개를 위한 폭주가 남긴 내상과 국격 훼손이 너무 크다. 하지만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등 민주주의 역사를 배우고 자라 2016년 대통령 탄핵과 2024년 비상계엄 사태를 직접 학습한 청년 세대는 비민주적인 권력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들은 결코 역사를 뒤로 돌리지 않을 것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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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산유국 반대 넘지 못한 ‘죽음의 알갱이’ 협약

    플라스틱 시대는 고작 100여 년 남짓이다. 지구의 역사에서 찰나도 되지 않는 순간에 존재하며 이처럼 지구를 위협한 발명품은 없었을 것이다. 1일까지 ‘플라스틱 오염 종식 국제협약’을 위한 정부 간 협상이 진행된 부산 벡스코에선 환경 운동가들이 폐그물에 목이 걸려 죽은 바다거북 사진, 범고래 뱃속에서 나온 플라스틱 병을 들고 “이젠 인간 차례”라고 호소했다. 햇빛과 바람, 물에 깎이고 쪼개진 지름 5mm 이하인 미세 플라스틱은 입자가 작아 어디든 침투할 수 있는 데다 화학물질에 쉽게 달라붙어 ‘죽음의 알갱이’로 불린다. ‘죽음의 알갱이’가 된 플라스틱이 먹이사슬을 타고 인간까지 공격하고 있다. ▷미세 플라스틱이 처음 학계에 보고된 건 2004년이다. 이후 20년간 7000건이 넘는 관련 논문이 발표됐는데 최근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이를 종합적으로 리뷰한 논문이 실렸다. 지금까지 물고기, 포유류, 새, 곤충을 포함해 1300종 이상의 동물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나왔다. 바다로 흘러 들어간 미세 플라스틱은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남극과 심해저에서도 발견된다. 공기와 물, 음식이 오염됐는데 인간만 무탈할 리 없다. 폐, 간, 신장, 혈액, 고환뿐만 아니라 미세 플라스틱 침투가 어려운 구조라고 봤던 뇌와 심장에서도 발견됐다. ▷미세 플라스틱은 세포에 염증 반응을 일으키고 흡착된 독성 화학물질을 배달한다. 소화기와 호흡기를 망가뜨리고 호르몬을 교란해 발달 장애, 생식 장애를 일으킨다. 암세포의 성장과 전이를 촉진시킨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미세 플라스틱을 먹인 쥐의 인지기능이 떨어지는 등 치매도 유발한다. 장기적인 유해성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플라스틱과 당장 헤어질 결심을 하기는 어렵다. 면봉부터 전투기까지 일상에서 쓰이지 않는 곳이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60년이면 플라스틱 생산량이 12억3100만 t으로 2019년의 약 3배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친환경 정책으로 석유 수요가 줄어들자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 미국 셸 등은 대규모 석유화학 단지를 짓고 있다. 정유회사들이 플라스틱 생산으로 눈을 돌린 것도 비관적인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2022년 유엔환경총회에서 처음 플라스틱 국제협약이 제안됐고 그간 네 차례에 걸쳐 각국이 협상을 진행했으나 접점을 찾지 못했다. 부산에서 열린 마지막 5차 협상 역시 빈손으로 종료됐다. 핵심 쟁점은 플라스틱 원료 물질인 폴리머 생산 규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 등 산유국이 이를 격렬히 반대한다. 썩지 않는 플라스틱은 한 번 태어나면 영생을 누린다. 생산 규제가 늦어진다면 꼭 플라스틱을 써야 할지 묻고 또 물으면서 덜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지구도 살고, 나도 산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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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색코뿔소’ 이민이 온다[오늘과 내일/우경임]

    지난 주말에도 동네 식당에선 한국어로 주문을 받는, 엘리베이터 안에선 이삿짐을 나르는 외국인 노동자를 만났다. 이들이 전혀 낯설지 않을 만큼 ‘코리안 드림’을 품고 한국을 찾는 외국인이 늘고 있다. 지난해 한국에 온 이민자는 8만7100명. 그 규모도 커졌지만, 속도는 더 과감하다. 이민자 증가율이 50.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으로 영국(52.9%)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지난해 합계 출산율(0.72명)이 최저를 찍었는데도 총인구가 늘어난 건 그 덕분이다. 우리나라는 3개월 미만 단기 체류자를 제외한 근로자, 결혼 이민자, 유학생 등과 그 자녀를 합한 등록 외국인 숫자를 OECD에 이민자로 보고하고 있다. 농어촌과 산업 현장의 일손 부족 해결을 위해 정부가 취업 비자 쿼터를 늘렸고, 코로나19 이후 유학생도 급증했다. 5년 이내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수가 300만 명을 넘어선다고 한다. 본격적인 이민 정책을 펴기도 전에 우리는 이민 국가로 들어서고 있다. 한국, 이민 증가율 OECD 2위 문제는 이민 확대에 대한 사회적 합의 없이 이민자 숫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 여론을 살펴보면 이민 확대를 두고 찬성과 반대가 비등비등하게 나타난다. 노동력 부족 해소에 이바지할 것이라 기대하면서도 종교, 문화 차이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우려한다. 하지만 정치적 휘발성이 크다 보니 정부는 공론화 과정 자체를 부담스러워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냥 이민을 피할 수 있을까. 올해 9년 만에 합계 출산율이 반등할 것으로 전망된다. 반가운 소식이지만 예상대로 0.74명으로 찔끔 오른다 해도 ‘인구 감소’라는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50년 안에 생산가능인구가 반토막이 난다. 이민 대신 여성과 노인 인력을 활용하면 생산가능인구를 늘릴 수 있다고 한다.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은 여전히 OECD 평균에 못 미치지만, 그 차이가 4%포인트 남짓이다. 노인 경제활동 참가율은 이미 OECD 국가 중에 1위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은 다 일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성과 노인 인력 활용만으로 생산가능인구 감소에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이민을 늘릴 수밖에 없다. 이민 정책 미루다간 감당 못 할 위기 이민은 노동력 공백을 메울 해법이지만 사회 통합 측면에서는 불안 요인이다. 오랜 이민 국가였던 프랑스 영국 미국 호주 캐나다 등도 코로나19 이후 이민자 규모를 단번에 대폭 늘렸다가 온 사회가 몸살을 앓고 있다. 저임금 노동시장에서 내국인과의 갈등이 빚어지고 주택 시장이 불안정해졌다. 이로 인한 반이민 정서가 정치적 지형을 바꿀 정도다. 유럽에선 극우 정당들이 득세하고 미국 대선에선 이민 정책이 승패를 갈랐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이민 정책은 저임금, 비숙련 노동자 위주로 산업 현장 수요에 즉흥적으로 대응하는 식이었다. 출입국 관리는 법무부, 외국인 고용허가제는 고용노동부, 다문화 학생은 교육부, 다문화 가족은 여성가족부 등 부처별로 뿔뿔이 흩어져 기본적인 국가 전략조차 전무했다. 내국인이 떠난 일자리에 외국인을 싸게 밀어넣어 저출산 고령화에 적응하는 고통을 피하는 쉬운 길을 택해 온 것이다. 이민자 숫자가 늘어날수록 정교하게 이민 정책을 설계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가 부담해야 할 비용도 늘어난다. 배타적이고 차별적인 문화, 이민자 2세 교육과 정착 지원 부족 등은 이민자에게 ‘2등 시민’ 되기를 강요해 사회 갈등의 씨앗이 될 것이다. 이민자가 나이가 들거나 일자리서 이탈하면 복지 재정 지출도 는다. 위기를 예상하고도 막상 닥치면 속수무책인 ‘회색 코뿔소’를 피하려면 서둘러 이민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중장기적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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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아파도 내 집에 있겠다”는 노인들의 독립선언

    요양시설에 입소하든, 병원에 입원하든 돌봄을 받는 처지가 되면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먹어야 하고, 졸리지 않아도 자야 하고, 마음대로 누굴 만날 수도 없다. 자녀의 돌봄 부담을 덜어주려 입소했다가 ‘친절한 감옥’이라며 집에 돌아온 어른도 봤다. 오래 산다기보다 느리게 죽는 공포를 느꼈다고 했다. 더욱이 콧줄을 꽂거나 기저귀를 차기라도 하면 내 삶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하나도 가질 수 없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23년 노인 실태조사를 조목조목 분석해 발표했다. 그 보고서 내용은 우리나라 노인들의 ‘독립선언’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몸이 아프더라도 ‘자녀 또는 형제자매와 같이 살겠다’는 응답은 2.5%에 불과했다. 가급적 ‘살던 집에서 계속 살고 싶다’(48.9%)고 했고 자녀와 같이 살기보다 차라리 노인 요양시설에 입소(27.7%)하거나 노인 전용주택으로 이사(16.5%)하겠다고 했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인 삶을 유지함으로써 노후에 존엄을 잃지 않고 자녀의 돌봄 부담도 덜어주고 싶다는 뜻이다. ▷1990년대만 해도 내 집에서 나이 들고, 내 집에서 죽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2000년대 들어선 20%대에 머물고 있다. 수명이 길어지면서 노인 돌봄 수요가 커졌고, 노인장기요양보험 도입으로 요양시설이 급증했다. 돌봄과 죽음은 자연스럽게 집 밖으로 밀려났다. 우리 사회가 고령화에 적응한 방법이었겠으나 노후 삶의 질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는 해법은 국민 대다수가 ‘병원 객사’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내 집에서 살다가 존엄한 임종을 맞이하려면 제도적 뒷받침이 절실하다. 지역사회에 기반한 통합돌봄 체계를 구축해 내 집에서 나이 들고 죽을 권리를 보장하는 해외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네덜란드는 돌봄평가기관(CIZ)이 노인마다 맞춤형 케어 프로그램을 짜서 가까운 시설과 연계해 준다. 만약 치매 노인이라면 주간 돌봄시설에서 텃밭을 가꾸고, 친구를 만나는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식이다. 일본은 몸이 불편해 이동이 힘든 노인 대신 의사와 간호사가 집집마다 왕진을 다니는 의료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노인들이 기본적인 일상생활을 유지하며 오래 집에서 머물도록 돕는 것이다. ▷노인들의 독립선언은 결국 내 집에서 ‘웰빙’을 하다가 ‘웰다잉’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다. 소박한 한 끼를 스스로 차려 먹고, 가족이나 친구와 담소를 나누고, 질병과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하루가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특별한 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노인 인구가 1000만 명을 넘어섰다. 이제 요양시설이나 병원을 무작정 늘려 돌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돌봄과 죽음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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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북촌 관광객 ‘야간통금’

    서울 종로구 북촌 야간 관광이 1일부터 금지됐다. 넉 달간 계도기간을 거쳐 내년 3월부터는 한옥이 밀집한 북촌로11길 일대를 오후 5시∼오전 10시 사이 돌아다니면 과태료 10만 원을 물어야 한다. 군부 독재 시절 잔재로나 여겨지는 야간 통행금지가 36년 만에 다시 소환된 건 ‘오버 투어리즘’(과잉 관광) 때문이다. 관광객이 몰려 삶을 침범당했던 주민들은 환영이고, 인근 상인들은 손님이 줄까 울상이다.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사이 폭 안긴 북촌은 한옥이 오밀조밀 모인 예스러운 동네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개량 한옥이 많다. 당시 건양사라는 회사가 몰락한 조선 관료나 양반가 한옥을 사들여 필지를 나눠 여러 채를 지은 뒤 대량 공급했다. 도심 개발 붐에 하나둘 스러지던 한옥은 2000년대 들어 가치가 재평가되며 보존 사업이 진행됐고 그 모습이 지금의 북촌이다. 원래 외지인 발길이 뜸했던 곳인데 ‘북촌 8경’ 등이 방송을 타면서 관광 명소로 떠올랐다. 지난해 북촌 거주자는 6100명. 관광객은 무려 1050배가 넘는 644만 명이 다녀갔다. ▷고즈넉한 한옥마을은 소음 피해와 쓰레기 무단 투기로 몸살을 앓았다. 요즘은 그나마 ‘소곤소곤 대화해 주세요’라는 안내판에 따라 관광객도 조심하는 분위기지만, 그간 주민들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와 화장실을 쓰거나 사진 촬영 등을 하는 ‘진상’ 관광객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특히 동대문과 도심 면세점을 도는 저가 쇼핑 관광 상품에 북촌이 포함되면서 관광버스가 줄을 섰고 골목은 몸을 부딪치며 걸을 정도로 붐볐다. ▷‘오버 투어리즘’은 동네 주민을 다른 곳으로 밀어내는 투어리스티피케이션(관광+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이어지곤 한다. 북촌 한옥마을의 인구는 최근 5년 새 27.6%나 줄어들었다. 관광객이 몰리자 한옥은 상업용으로 팔리거나 한옥스테이로 개발됐다. 버티던 주민들도 “살 수가 없다”며 떠나기 시작했다. 에어비앤비 등 공유 숙박이 번창해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주민들이 이용하던 가게가 사라져 정주 여건이 악화한 포르투갈 리스본이나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뒤를 밟고 있는 셈이다. ▷유엔 세계관광기구는 올해 해외 관광객이 15억 명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지역 경제에 기여하는 관광을 막을 수도, 손님이 주인집을 차지하는 ‘오버 투어리즘’을 방관할 수도 없는 각국은 나름의 해법을 내고 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는 한 사람당 5유로씩 도시 입장료를 받기 시작했고, 일본 오사카도 관광세 도입을 추진 중이다. 벨기에 브뤼허와 이탈리아 피렌체는 에어비앤비 등 신규 숙박업 등록을 금지했다. 서울이 매력적인 관광지가 된 것은 반갑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야간 통행 금지가 주민과 관광객이 공존하는 ‘서울식 해법’이 되기를 바라 본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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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사무실로 출근해라, 아니면 해고”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가 내년 1월부터 주 3일은 반드시 사무실로 출근해야 하고 이를 준수하지 않으면 해고할 수 있다고 미국 본사 직원에게 통보했다. 올해 1월부터 사무실 출근과 재택근무를 혼합한 ‘하이브리드형’ 근무제를 운용했지만, 정착이 더디자 해고까지 언급하는 강수를 둔 것이다. 실적이 뚝뚝 떨어진 스타벅스의 구원투수로 등판한 브라이언 니콜 최고경영자(CEO)가 사무실 출근을 주도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난 이후 사무실 근무로 회귀하는 미국 기업들이 늘고 있다. 2020년 재택근무를 앞장서 도입한 구글은 최소 주 3일 사무실 출근을 권고하고 이를 인사고과에 반영한다. 메타 역시 주 3일 사무실 출근을 하지 않으면 해고가 가능하다. 아예 대면 근무로 전환한 기업도 있다. 아마존은 내년부터 사무직 직원은 주 5일 출근해야 한다. JP모건은 임원에겐 주 5일 출근을 요구하고 있다. ▷기업들은 재택근무를 해보니 대면 근무의 장점이 분명하더라고 말한다. 재택근무로 일상적인 업무는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지 몰라도 협업을 통한 혁신이나 생산성 향상 등은 일어나지 않았다. 직원 간 피드백이 줄면서 역량이 정체되고 조직 문화를 공유하기도 어려웠다. 최근 에릭 슈밋 전 구글 CEO는 인공지능(AI) 경쟁에서 뒤처진 배경으로 재택근무를 꼽으며 “구글이 승리보다는 ‘워라밸’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논란이 커지자 그 발언을 거둬들였지만 아마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재택근무의 편안함을 경험한 미국 직장인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사무실 출퇴근을 해보지 않은 MZ 직장인들은 규칙적인 출근 자체를 고통스러워한다. 최근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의 설문에 따르면 아마존 직원 73%가 주 5일 사무실 출근 통보 이후 새로 구직에 나선 것으로 나타났다. 갑자기 회사 근처로 이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 사실상의 퇴직 강요 아니냐는 의구심도 있다. 실적이 악화한 스타벅스나 중간 관리자를 10% 감축하겠다고 밝힌 아마존이 사무실 출근을 강제한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빅테크들이 생성형 AI 보급으로 개발자 수요가 줄어들자 사무실 근무로 선회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대면 근무로 속속 선회하는 회사와 재택근무를 선호하는 개인 간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지면서 ‘하이브리드형’ 근무 형태가 37%로 재택근무(32%)나 사무실 근무(31%)를 앞질렀다. 미국 회사 약 9000곳의 근무 형태를 조사한 결과다. 평균 출근일은 주당 2.5일이다. 회사와 직원 간 어느 정도 절충이 이뤄진 셈인데 앞으로 어떤 근무 형태가 대세가 될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 동료와 일하며 자극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회사뿐만 아니라 개인도 성장한다는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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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뉴진스 하니 출석시켜 ‘코미디 국감’ 벌인 의원들

    걸그룹 ‘뉴진스’ 멤버 하니가 15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참석했다. 그 발단은 지난달 11일 뉴진스가 올린 영상이었다. 하니는 이 영상에서 “하이브 사옥 복도에서 마주친 다른 그룹 매니저가 (따라오는 멤버들에게) ‘무시해’라고 했다”고 말했다. 뉴진스 소속사인 어도어의 모회사인 하이브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는 주장이다. 이후 환노위 소속 의원실에 ‘직장 내 괴롭힘을 조사해 달라’는 팬들의 집단 민원이 쇄도했다고 한다. ▷안호영 환노위원장(더불어민주당)이 “직장 내 괴롭힘 문제를 질의하겠다”며 하니를 참고인으로, 소속사 어도어 대표인 김주영 하이브 최고인사책임자를 증인으로 각각 불렀다. “나 결정했어! 국회에 나갈 거야! 국정검사(감사를 잘못 표기)! 혼자 나갈 거예요.” 국감도 띄우고, 성난 팬심도 달래보고자 증인도 아니고 참고인으로 슬쩍 불러봤는데 “뉴진스를 지키겠다”며 하니가 출석 선언을 한 것이다. 정말 나올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의원들이 더 놀랐다는 뒷말이 들린다. ▷팬덤의 눈치가 보였던 탓인지 국감이 진행된 1시간가량 의원들의 질의는 공손했다. “참고인 하니 팜 님께 질문하겠습니다” “하니 팜 님,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안 위원장), “뭣 때문에 회사가 싫어한다고 생각하시나요”(국민의힘 우재준 의원), “하니 팜 씨가 직접 ‘무시해’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폭로해서 국민들의 충격이 크다”(민주당 박홍배 의원), “오늘 하니 님이 하신 것이 엔터업계가 ‘우리도 노동자이고 인간’이라는 목소리를 낸 역사적 순간”(진보당 정혜경 의원). 이날 환노위 국감장에 불려 온 기업인들이 면박 섞인 질의를 들으며 연신 고개를 숙여야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국정감사는 국회가 정부 부처와 기관을 감사해 국정 운영에 문제가 없는지 따지는 자리다. 양측 주장이 엇갈리는 뉴진스 소속사 내부 갈등이 국감 대상인지도 의문이고,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닌 걸그룹 멤버가 ‘직장 내 괴롭힘’의 대상인지도 불확실하다. 안 위원장은 하니 출석과 관련해 “노동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자의 현실을 다루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날 국감에선 산업재해로 숨진 하청 노동자 문제도 다뤄졌다. 정작 노동법으로 보호받지 못한 노동자 문제는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니 출석으로 환노위 국감은 ‘팬 미팅’으로 희화화됐고 같은 시간 진행되던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 국감까지 파행을 겪었다. 최민희 과방위원장이 국감 도중 하니와 별도 만남을 가진 사실이 논란이 되어 여야 간 거친 공방이 오가면서다. 무더기 자료 제출과 증인 신청 요청, 막말과 호통만 주고받는 질의로 부족해 이젠 연예인 팬 미팅까지 자청하고 있으니 국감 무용론이 나와도 할 말이 없게 됐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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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韓 국채 ‘선진클럽’ 편입, ‘공매도 금지’ 주식은 번번이 좌절

    내년 11월부터 세계국채지수(WGBI)에 한국 국채가 편입된다. 재작년 9월부터 4차례 시도 끝의 성공이다. 영국의 시장지수 산출 기관인 ‘파이낸셜타임스스톡익스체인지(FTSE) 러셀’이 운영하는 WGBI는 블룸버그, JP모건 지수와 함께 세계 3대 채권 지수로 꼽힌다. 미국 일본 영국 등 선진국 국채가 모두 포함돼 있어 연기금 등 글로벌 ‘큰손’들의 투자 나침반이다. 지수 편입으로 한국 국채에 대한 외국인의 투자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2년 전부터 WGBI 편입을 추진한 한국은 국채 발행 규모, 국가 신용등급을 충족하고도 외국인에 대한 과세 체계, 외환시장 개방성 부문 점수가 낮아 문턱을 넘지 못했다. 국내총생산(GDP) 순위 세계 10대국 중 빠진 건 한국과 인도뿐이었다. 하지만 그사이 외국인의 투자 소득에 세금을 물리지 않도록 제도를 정비하고, 원-달러 거래 시간을 다음 날 오전 2시까지 연장하는 등의 보완 조치를 한 끝에 이번엔 편입됐다. ▷WGBI에 투자되는 민간 자금은 약 2조5000억 달러, 한화로 약 3400조 원 규모다. 한국이 지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2%로 560억 달러(약 75조 원) 정도의 외국인 자금이 새로 유입될 가능성이 있다. 한국 국채 수요가 늘면 국채 가격은 오르고, 정부는 낮은 이자에 국채를 발행할 수 있게 된다. 올해 말 1200조 원에 육박할 국가채무를 고려할 때 이자 부담 감소는 반가운 일이다. 다만 마냥 축포를 터뜨릴 일만은 아니다. 외국자본 비중이 커지면서 국내 자본 시장이 대외 변수에 더 민감해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채권 ‘선진 클럽’ 편입으로 채권 시장의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상당 부분 해소될 것으로 전망된다. 남은 과제는 여전히 극심한 저평가를 받는 주식 시장이다. 한국은 2008년부터 주식 분야의 ‘선진 클럽’인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선진국 지수 편입을 시도해 왔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셔 신흥국 지수에 머물러 있다. 특히 MSCI는 한국 정부가 작년 11월 시작한 공매도 전면 금지를 문제 삼고 있다. 주식 시장에서 거품을 빼는 기능을 하는 공매도를 금지하는 한 선진국 증시로 보기 어렵다는 거다. ▷채권에 앞서 한국 증시를 선진국 지수에 포함시켜 온 FTSE 러셀도 이번에 “공매도 재개 목표가 달성되지 않으면 한국 증시 분류에 대해 추가 조치를 논의할 수 있다”고 했다. 일각의 우려처럼 공매도 금지를 이유로 한국을 ‘관찰대상국’으로 강등하진 않았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돼선 안 된다는 경고다. 정부가 주식 투자자들 눈치만 보느라 전혀 선진국답지 않은 공매도 금지를 고수하는 동안 대규모 해외 자본이 한국 증시에 들어올 물길을 넓힐 진짜 ‘밸류업’은 위협받고 있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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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의대 5년제로 단축”… 잇단 ‘땜질 처방’ 중에도 가장 황당

    의대 공부량은 어마어마하다. 그중에서도 해부학 병리학 등 ‘기초의학’과 내과 외과 등 ‘임상의학’을 동시에 배우는 본과 1, 2학년의 공부량은 압도적이다. 배우는 과목이 많다 보니 하루 8시간씩 꼬박 수업을 듣고 2, 3주에 한 과목씩 시험을 치른다. 과목당 2000∼3000쪽에 달하는 강의 자료를 통째 외워야 할 정도로 암기량이 많다고 한다. 똑똑한 학생들이 모였는데도 의대 유급 비율이 꽤 높은 까닭이다. 이처럼 빡빡한 의대 교육과정을 교육부가 6년제에서 5년제로 단축할 수 있다고 밝혀 논란이다. ▷교육부는 6일 의료인력 수급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의대 교육과정을 탄력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하겠다며 그 예로 ‘5년제 의대’를 들었다. 이대로 의대생이 복귀하지 않고 의사국가시험을 거부할 경우 내년에 의사 3000명이 사라질 테니 그 뒷감당이 두려웠을 것 같다. 어떡하든 졸업을 시키겠단 얘기니 말이다. 비판 여론이 비등하자 교육부는 “5년 단축이 의무가 아니다. 대학 사정에 따라 학사과정을 조정하도록 길을 터 주려는 것”이라고 진화에 나섰다.당장 7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선 의대 5년제를 두고 “수의대도 6년인데…” “덤핑 세일이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의료계는 압축 수업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억지로 시행했다간 의대 교육만 부실해질 것이라고 반발했다. 이종태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 이사장은 “교육과정을 5년으로 줄이면 방학도 없이 기계처럼 공부해야 한다”, 김성근 전국의대교수협의회 대변인은 “정부가 6년 교육과정도 임상 실습이 부족하다며 개원 면허제를 도입하겠다고 했으면서 의대 교육과정을 축소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고 했다. ▷해외에서도 의대는 기본적으로 6년이다. 미국에선 6년제 통합 의대를 다니거나 아니면 대학 졸업 이후 4년제 메디컬 스쿨에 진학해야 한다. 그다음 의사면허시험(USMLE)에 통과해야 의사가 된다. 일본 독일 등도 6년제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국가시험을 치른다. 그래서 의료계에선 의대 5년제가 되면 해외에선 우리나라 의대 졸업자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한다. ▷2월 의대 증원 발표 이후 의대생 1만8000여 명이 학교를 떠났다. 정부는 ‘휴학을 불허한다’며 의대생이 돌아오기를 손 놓고 기다리다가 이제야 졸속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11월까지만 돌아오면 압축 수업을 통해 진급시키겠다고 하고, 5년제 의대도 가능하다고 한다. 기출문제 및 학습지원자료, 이른바 족보를 공개적으로 공유하는 의대교육지원센터도 운영한다고 한다. 교육부는 의대 5년제를 두고 “미국은 파병이 있는 경우 군의관을 조속히 배출하기 위해 압축적으로 커리큘럼을 운영한다”고 설명했다. 어쩌다 우리 의료 시스템이 유사 전시 상황에 처한 것인가.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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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우경임]청년에 고통 미루는 ‘대증요법’ 개혁, 의료뿐인가

    추석 연휴 직전 이른바 ‘빅5’ 전공의 대표들이 전공의 약 1만 명의 집단 사직 교사 혐의로 차례대로 경찰에 출석해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경찰 주장대로 집단행동이든, 전공의 주장대로 자발적인 선택이든 일제히 환자 곁을 떠난 건 직업 윤리상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취재진 앞에 선 그들의 항변을 듣자니 전공의 집단 사직을 개인주의적 MZ세대의 ‘탕핑(躺平·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만 치부하기엔 그 울분은 합당했고, 좌절은 깊었다. “상급병원 VIP들이 의료 정책 결정” 11일 김유영 삼성서울병원 전공의 대표는 “언제, 어디가 아파도 상급병원에서 VIP 대접을 받는 권력자들이 의료 현안, 의료 정책을 결정한다는 게 화가 난다”고 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사이로 분기탱천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마취과 전공의로 돈 벌기는 어려운 소아마취 전문의를 꿈꿨지만, 그 꿈을 접었다고 했다. 병원에서 밤낮으로 일하던 대한민국 청년이라는 한성존 서울아산병원 전공의 대표는 “미래 세대를 짓밟는 일방적인 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김태근 가톨릭중앙의료원 전공의 대표는 “현 정부의 정책은 젊은 세대에게 많은 책임을 전가한다”고 했다. 이들은 의대 2000명 증원이 기성세대의 기득권을 지키면서 청년 세대를 착취하는 ‘가짜 개혁’ 아니냐고 묻고 있다. 1977년 처음 도입된 국민건강보험은 ‘저(低)부담, 저수가, 저보장’으로 설계됐다. 국가와 국민이 가난했던 시절이라 보험료와 수가를 낮게 책정하는 대신 보장 범위를 최소화했다. 그동안 왜곡된 수가의 풍선 효과로 필수의료 기피 현상이 심각해졌고, 역대 정권마다 보장성 강화를 외치면서 건강보험은 서서히 망가져 왔다. 전공의들은 이 낡은 시스템을 수술하지 않고 의사 수를 늘려 땜질하려는 데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지속 가능하지 않은 의료 시스템을 지탱한 건 수련이라는 명목으로 싼 임금을 감수했던 전공의였다는 사실이 이번 의정 갈등 속에 드러났다. 이들은 보험료 인상이라는 정치적 부담을 지지 않을 정부도, “의대 교수들은 착취의 중간관리자”라고 했듯 제도에 순응해 과실을 독점한 선배 의사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의대 증원으로 진통제를 놓아 오늘을 넘기고 보는 게 의료 개혁의 본질이라고 판단했다.다른 청년들은 비명조차 지를 수 없다 그래도 전공의들은 의사 면허를 가졌기에 7개월이 넘도록 탕핑도 하고, 재취업도 하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치열한 생존 투쟁이 벌어지는 우리 사회에서 저항할 권리를 누린다는 것도 특권일지 모르겠다. 기성세대가 만든 사회 제도 안에서 질식당한 채로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청년이 훨씬 많다. 근로자의 10%인 정규직이 임금과 복지를 독차지하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아래서 양질의 일자리를 구하려는 청년들의 취업 전쟁은 눈물겹다. 정부의 노동 개혁은 이런 핵심은 손도 못 대면서 주 52시간 개편 같은 지엽적인 과제조차 회피한다. 청년 세대에 빚만 물려주게 생긴 연금은 어떠한가. 5월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인상하는 국회 모수개혁안을 걷어차고는 세금 먹는 하마인 기초연금 인상을 앞세운 정부 개혁안을 내놓았다. 한 해 출생아 수가 20만 명대로 줄었는데 여전히 ‘산업 전사’ 대량 생산에 맞춰진 교육은 가장 심각하다. 교수나 교사의 반발을 불러올 구조조정보다는 대입 제도처럼 줄 세우는 방법만 바꾸면서 학생들을 우롱한다. 그러면서 교육발전특구 도입 같은 개혁 시늉만 낸다. 박재일 서울대병원 전공의 대표는 이번 의료 개혁을 두고 “대한민국에 오점으로 남을 것”이라고 했다. 미래 세대에 숨통을 틔워 주기보다 공고히 쌓인 기득권을 우회하려는 4대 ‘대증요법’ 개혁 모두 그렇지 않나. 그마저도 멈춰 있지만 말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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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200년 만의 폭우 쏟아지더니 하루 만에 가을

    으레 긴 옷을 입고 차례를 지냈던 추석인데 이번에는 에어컨조차 끌 수 없었다. 아무리 이른 추석이라지만 연휴 내내 낮 최고기온이 30도를 웃도는 이상한 날씨였다. 지독하게 덥고 길었던 여름을 밀어낸 건 여름 장마보다 무섭게 내린 가을 폭우였다. 19∼21일 사흘 동안 남부 해안과 제주 산지에는 최대 500mm 이상, 남부 내륙과 충청에는 200∼300mm 안팎의 비가 쏟아졌다. 경남 창원에는 21일 하루 397.7mm, 시간당 최대 104.9mm의 비가 내렸는데 기상청은 “200년 만에 한 번 내릴 만한 비”라고 했다. ▷비가 그치자 청명한 가을 날씨가 찾아왔다. 전국적으로 낮 최고기온이 25도 안팎이라 아직 여름이 끝났다고 보긴 어렵다. 하루 평균 기온이 20도 밑으로 떨어지고 다시는 올라가지 않아야 비로소 가을이 시작됐다고 본다. 하지만 기온이 갑작스럽게 10도 가까이 뚝 떨어진 탓에 체감상 쌀쌀하게 느껴진다는 사람이 많다. 제주는 폭우가 지나간 21일 밤에야 75일간 이어지던 열대야가 공식적으로 끝났다. ▷일주일 새 폭염과 폭우가 번갈아 나타나는 예측 불가능한 날씨는 과거와 다른 대기의 순환에서 비롯됐다. 여름은 보통 고온다습한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을 받는데 고온건조한 티베트 고기압과 중첩돼 ‘이중 열 커튼’이 형성되면 폭염이 찾아온다. 티베트 고기압이 이례적으로 한 달 이상 머물면서 이번 추석까지 폭염이 이어졌다. 올여름 유독 태풍이 힘을 쓰지 못한 이유도 티베트 고기압에 막혀 한반도를 비켜 갔기 때문이다. ▷극한 폭우를 불러온 14호 태풍 ‘풀라산’도 열대 저압부로 세력이 약화해 한반도에 진입했다. 엄청난 양의 뜨거운 수증기는 그대로 머금은 채였다. 그사이 차가운 대륙성 고기압이 남하하고, 더운 북태평양 고기압이 버티면서 정체전선이 형성됐다. 두 기압 사이 갇힌 수증기가 극한 호우를 뿌렸다. 짧은 가을장마의 원인은 여느 해와 다를 바 없지만 수증기량이 늘어 강수의 강도가 세졌다. 지구 온도가 1도 올라갈 때마다 대기 중 수증기량이 7%씩 늘어난다고 한다. ▷이런 기상 이변은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온도 상승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일정했던 대기의 순환이 해수면이 뜨거워지면서 엉클어진 것이다. 특히 북반구 중위도에 있는 한반도는 여름에는 위력적인 태풍이, 겨울에는 극단적인 한파가 찾아올 가능성이 커졌다. 해수면 온도가 오르면 태풍은 습해지고 강력해진다. 빙하가 녹아 북극 주변에 찬 공기를 가두고 있던 소용돌이(vortex)가 약해지면 한반도까지 한파가 내려온다. 올해도 가을다운 가을날은 거의 없고 곧바로 한파가 닥칠 것으로 예고됐다. 인간이 만든 재앙인 지구 온난화가 이제는 인간을 덮치고 있다. 지구에서 서로 연결되지 않은 존재는 없다는 사실이 새삼 섬뜩하게 다가온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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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세계 최고 수준 인정받은 한국 의료, 하지만…

    미국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가 발표한 ‘월드 베스트 전문 병원(World’s best specialized hospitals)’ 명단에 한국 병원이 대거 선정됐다. ‘월드 베스트 전문 병원’은 의사, 의과학자 등 전문가 대상 설문조사, 환자 만족도, 치료 성공률 등 의료 성과 지표 등을 종합해 순위가 결정된다. 암, 신경과, 내분비과, 소아과, 정형외과 등 12개 임상 분야에서 각각 최고 병원의 순위를 매겼다. 한국은 암 치료 상위 300위 안에 16곳이, 내분비과는 150위 안에 21곳이, 소아과는 250위 안에 25곳이 포함됐다. 나머지 임상 분야에서도 빠짐없이 이름을 올렸다. ▷암 분야에선 삼성서울병원이 3위, 서울아산병원이 5위, 서울대병원이 8위를 차지했다. 메이오 클리닉, MD앤더슨 암센터 등 세계적인 병원에 뒤지지 않는다. 암 치료를 잘하는 덕분에 우리나라 암 환자 10명 중 7명은 암을 진단받고 5년 이상 생존한다. 사실상 완치라는 판정을 받는단 뜻이다. 우리나라 위암 생존율은 68.9%로 미국의 2배, 영국의 3배 정도다. 대장암 생존율도 71%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 병원의 경쟁력은 공보험 체제 아래서 민간 병원이 경쟁하는 독특한 의료 시스템에서 나온다. 암 환자의 경우 진료비의 5%만 낸다. 나머지는 국민건강보험에서 부담한다. 환자가 쉽게 병원을 찾을 수 있으니 병원에는 그만큼 많은 임상 데이터가 축적된다. 서울 대형 병원들은 한 해 1만∼2만 건씩 암 수술을 한다. 환자 유치를 위한 민간 병원의 치열한 경쟁도 실력이 뛰어난 이유다. 로봇 수술 등 새로운 치료법에 적극적으로 도전한다. 우수한 인재들이 꾸준히 유입된 덕분도 있다. ▷이런 비약적인 발전이 약 70년 동안 이뤄졌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놀랍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 의료의 씨앗이 뿌려진 건 미국의 원조 프로그램인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통해서였다. 1955년 서울대 의대 소속 의사 12명이 미네소타대 의대로 건너가 연수를 받았다. 이들이 돌아와 심장병 수술을 했고, 감염병 퇴치에 나섰다. 지금은 해외에서 우리나라에 의술을 배우러 온다. 이번 뉴스위크 순위에서 서울대병원은 상위권에 올랐지만 미네소타대병원은 아예 순위 밖이었다. ▷하지만 의정 갈등의 장기화로 한국 의료가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전공의 집단 사직 이후 상급종합병원의 암 수술 건수가 급감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7월 위암 대장암 간암 등 6대 암 수술 건수는 3만8000여 건으로 지난해 동기 대비 17%가량 줄었다. 전문의는 진료와 수술에 지쳐 연구를 할 수 없는 처지다. 수련받는 전공의가 없으니 대단한 술기가 전수되지 않는다. 힘들게 쌓은 탑이 무너질 판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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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트럼프도 해리스도 “US스틸, 일본에는 못 준다”

    미국 노동절인 2일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를 유세차 찾은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선 후보 겸 부통령의 첫마디는 “US 스틸은 미국인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기업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였다. 이어 “언제나 철강 노동자들을 지키겠다”고 했다. 1901년 US스틸이 탄생한 곳이 피츠버그이고, 지금도 본사가 자리한다. 피츠버그를 통틀어 가장 높은 건물이 US스틸 타워다. 노동절에 ‘러스트벨트(Rust Belt·쇠락한 공업지대)’ 한복판인 피츠버그에서 노조 표심을 향한 구애를 펼친 것이다. ▷펜실베이니아주는 11월 미국 대선의 핵심 경합지 중 하나다. 2020년 대선에선 조 바이든 대통령이, 4년 전인 2016년 대선에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신승을 거뒀다. 노조원 120만 명인 철강 노조의 지지 없이는 펜실베이니아주서 승기를 잡을 수 없고, 대선 승리도 장담할 수 없다.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를 “끔찍한 일”이라 했던 트럼프 전 대통령도 지난달 펜실베이니아주 요크를 찾아 “일본이 사지 못하도록 막겠다”고 약속했다. ▷일본제철이 ‘미국 산업화 100년의 역사’ 자체인 US스틸을 149억 달러에 인수하겠다고 발표한 건 지난해 12월이다. 관세 등 무역장벽이 높고 단단해지자, 미국 시장을 직접 뚫고 세계 3위 철강 기업으로 올라서겠다는 전략이었다. 곧장 전미철강노조가 들고일어났고 의회는 “국가 안보에 핵심적인 사안”이라며 거들었다. 결국 재무부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에 회부됐다. 여기선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외국인의 투자를 제한할 수 있다. ▷그간 US스틸에 대한 조 바이든 대통령의 강경한 태도는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쳐 온 트럼프 전 대통령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해리스 후보의 노동절 발언은 그 연장선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4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 직후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서 일본제철의 인수를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이어진 국빈 만찬에는 전미철강노조 위원장을 초청해 기시다 총리를 대놓고 불편하게 했다. ▷트럼프와 해리스,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는 무산될 위기다. 국내에선 세계화에서 낙오해 일자리를 잃은 백인 노동자의 좌절이 분출되고, 국외에선 중국이 미국의 리더십에 도전해 오면서 ‘아메리카 퍼스트’가 초당적인 합의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다급해진 일본제철은 펜실베이니아주와 인디애나주 2곳의 US스틸 제철소에 13억 달러 규모의 추가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사실상 US스틸의 일자리 보존을 약속한 셈이다. 앞서 트럼프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마이크 폼페이오 전 장관을 고문으로 영입하며 치열한 로비전도 벌이고 있다. 하지만 미국 우선주의의 거센 흐름을 거스르긴 어려워 보인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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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송혜희 좀 찾아주세요” 현수막 260개로 남은 아버지

    “죽더라도 찾고 죽어야지, 그냥 죽을 순 없다”던 아빠였다. 25년간 전국 방방곡곡에 ‘실종된 송혜희를 찾아주세요’라는 현수막을 걸었던 송길용 씨(71)가 결국 딸을 찾지 못하고 교통사고로 숨졌다. 지난달 26일 현수막을 싣고 나갔다가 덤프트럭과 충돌하는 사고를 당했다. 송 씨는 25년간 매주 전단 4000장을 뿌렸고, 매달 현수막 300개를 걸었다. 평소와 달리 연락이 뜸한 것을 이상하게 여긴 현수막 업체가 실종자 가족 단체에 연락하면서 그의 죽음이 알려졌다. ▷송혜희는 17세가 되던 1999년 2월 학교에 갔다가 귀가하는 길에 행방불명됐다. 경기 평택시 집으로부터 1km가량 떨어진 버스정류장에 내린 후 흔적이 사라졌다. 당시 버스 운전사가 30대 남성이 따라 내렸다고 증언했으나 용의자를 잡지 못했다. 현수막 속의 딸은 여전히 교복을 입은 앳된 모습이다. 배움이 짧은 아버지는 전교 1, 2등을 다투고 서울대를 가고 싶다던 딸 혜희를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딸이 실종되고 처음 3년간은 부부가 함께 전국을 돌며 전단을 뿌렸다. 도대체 맨정신으로는 다닐 수가 없어 소주 한 병을 마시고 전단을 나눠주고, 또 마시고 나눠주곤 했다. 그동안 엄마는 뼈만 앙상히 남은 채로 몸과 마음에 병을 얻었다. 결국 엄마는 딸이 실종되고 7년이 지났을 때 전단이 흩어진 방에서 스스로 세상을 등진다. 아내 장례를 치르고 따라가겠다고 결심했던 송 씨의 마음을 돌린 건 남은 자식이었다. 큰딸은 “아빠 죽으면 같이 죽겠다”며 오열했다. ▷‘신장 163cm, 얼굴이 둥글고 검은 피부, 흰 블라우스 빨간색 조끼 파란색 코트. 가족이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길거리를 지나다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이 현수막은 늘 새로 단 듯했다. 송 씨는 한 달에 현수막을 300개가량 걸었다. 달이 바뀌면 혹시 찢어졌을까, 떨어졌을까 첫 현수막부터 점검을 하거나 교체했다. 현수막을 걸다 낙상을 당해 허리를 다쳤고, 뇌경색으로 쓰러져 최근엔 몸이 온전치 못했다. 주변에선 그만하라고도 했다. 그래도 “자식이라 포기를 못 하겠다”며 다시 집을 나섰다. 지금도 전국에 현수막 260여 개가 걸려있다. ▷2022년 기준 실종 당시 18세 미만이던 1년 이상 장기 실종 아동은 981명이다. 송 씨의 딸 혜희처럼 20년 이상 장기 실종 상태인 아동이 859명을 차지한다. 최근엔 유전자검사, 폐쇄회로(CC)TV 등 기술의 발달로 실종 아동 수가 줄고 있기 때문이다. 송 씨 가족처럼 실종 아동을 둔 가족의 삶은 아이를 잃어버린 날에 멈춰 버린다. 실종 가족을 찾는 방송에서 송 씨는 딸을 향해 “아무것도 묻지 않을 테니 돌아와만 달라”고 했다. 시청자에겐 “연락 주시면 신장이라도 떼어 드릴게요”라고 했다.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었을지, 그 비통함을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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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초중고까지 덮친 딥페이크 성범죄

    자기 얼굴이 나체에 합성된 ‘딥페이크’ 사진과 함께 공개된 신상 정보를 보고 여성들이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다. 공포는 나의 안전에 대한 위협이 그 본질이다. 유명 공포 영화 속 샤워실 살인 장면처럼 가장 사적인 공간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낄 때 우리는 극도의 공포를 느낀다. 친밀한 누군가가 나를 벌거벗겨 능욕할 수 있고, 일상을 공유하는 SNS가 위험천만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도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전국 초중고교에서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범죄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으로 확인돼 교육 현장이 발칵 뒤집혔다. 가해자들은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셀카를 인공지능(AI)으로 음란물과 합성해서 유포했다고 한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주로 10대다. 현재 피해 상황을 취합 중인데, 피해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학교는 450곳에 육박한다. ‘지능방’(지인능욕방) ‘겹지인방’(겹치는 지인방) 등으로 검색한 방의 숫자가 이런 정도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따르면 이 중 40곳에서는 실제 피해가 확인됐다. 피해자 중에는 여교사도 있다고 한다. ▷딥페이크 성범죄가 최근 주목을 받게 된 발단은 인하대 사건이다. 텔레그램에 자신의 딥페이크 음란 사진이 유포됐다는 것을 알게 된 인하대 졸업생 유모 씨는 해외에 서버가 있다는 이유로 경찰이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자 자신이 직접 추적에 나섰다. 딥페이크가 올라온 방을 찾아 들어갔더니 자신의 음란 사진, ‘주인님’이라 하는 음성 파일, 이모티콘까지 공유되고 있었다. 이 사건이 보도되자 ‘나도 혹시’ 하며 불안감을 느낀 10, 20대 여성들이 자신도 피해자가 된 것은 아닌지 텔레그램을 뒤지기 시작했다. ▷유 씨가 1년 넘도록 끈질기게 증거를 모았지만 처벌을 받은 사람은 그 방 참여자 1200명 중 단 1명에 그쳤다. 붙잡히긴 했지만 “우연히 봤다”고 주장해 풀려난 참여자도 있었다. 성폭력처벌법이 허위 영상물을 제작·유포하는 것은 처벌해도 단순히 시청만 하는 것은 죄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피해자에게 직접 연락하고 딥페이크를 유포한 1명만 징역형을 받은 것이다. 실정이 이렇다 보니 이번에 초중고에서 피해 사례가 확인돼도 처벌이 제대로 될지 의문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번 사건도 유 씨 사례처럼 피해자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직접 나선 경우다. 딥페이크 사진이 유포된 방을 찾아 증거를 수집하고 학교 명단을 작성했다. 소셜미디어 계정을 비공개하고 사진도 감췄다. 확인된 피해가 늘어나고 여론이 들끓자 그제야 경찰은 대대적인 단속을 약속했다. 국회에선 처벌을 강화하는 입법이 쏟아진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모욕이 놀이가 되고, 혐오를 과시하는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한 평범한 하루가 언제 공포로 뒤덮일지 모를 일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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