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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이를 좀 올려갖고 홍준표보다 2% 앞서게 해 주이소”라는 정치 브로커 명태균의 음성은 충격적이었다. 이런 조작 정황과는 별개지만, 정치 여론조사의 신뢰를 높이는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윤석열 대통령 국정 지지율이 40.0%까지 올라간 여론조사가 5일 발표된 것도 조사 품질에 대한 궁금증을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대통령 40% 지지율 조사는 아시아투데이가 의뢰했고, 한국여론평판연구소가 조사했다. 응답률은 4.7%였다. “체포영장 불법 논란에도 공수처가 대통령을 강제 연행하는 것은 어떻게 보느냐” “부정선거 의혹 해소를 위해 선관위 공개 검증이 필요하냐”는 질문이 앞쪽에 배치됐다. 강성 우파의 주장을 강조한 질문들로, 응답자 중 일부는 거부감 때문에 전화 통화를 중단했을 수 있다.제안 1: 국제 기준 응답률 도입해야 낮은 응답률(4.7%)은 낮은 품질과 직결된다. 훈련된 면접 조사원이 아니라 저비용 ARS 기계가 전화를 거는 방식이어서 더 낮아졌다. 한국조사협회가 결의했던 “자동번호생성 방식 때 응답률이 7% 이하일 땐 공표하지 않겠다”는 기준에 못 미친다. 조사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통상 010 전화번호 10만 개를 발생시켜 걸면 2만 개 번호는 결번이다. ARS로 건다면 8만 명 중에 통화 중 혹은 부재중이거나, 응답 거절인 경우가 줄잡아 6만 명이다. “여보세요”라며 통화를 시작한 것이 2만 명쯤이다. 1000명이 끝까지 답변했다고 가정할 때, 한국의 응답률은 2만 명을 기준으로 5%가 된다. 하지만 실제 접촉 시도한 8만 개 번호를 기준으로 보면 1.25%다. 국제 기준(AAPOR)을 쓰는 미국은 1.25%를 적용한다. 통계학자들 권유처럼 우리도 “국제 기준으로 바꾸겠다”는 곳이 나올 때가 됐다. 아시아투데이 조사를 국제 기준에 맞춰 보면 0.89%에 그친다. 응답률이 낮아진다는 것은 ‘민심의 실체’와 더 멀어진다는 뜻이다. 인구 비중이 1.3%인 제주도를 예로 들어보자. 통상 샘플인 1000명 가운데 제주 주민은 13명, 그 가운데 30대 여성은 성·연령 비율에 따라 1명만 답하면 된다. 이틀 동안 이런 일이 벌어진다. 월요일에 ARS 장비가 전화를 건 제주 30대 여성 가운데 A는 전화를 안 받고, B는 받자마자 끊고, C∼K는 부재중이다. 화요일 저녁에 가서야 80번째 누군가가 답변을 마쳤다. 통화 중과 수신 거부 60명을 빼고, 전화를 받았던 20명 중 1명이다. 이럴 때 응답률이 5%다. 80번째 여성은 왜 79명과 달리 자기 시간 5분을 들여 응했을까. 만약 아시아투데이처럼 불법 체포영장 같은 질문을 받았더라도 끝까지 견해를 밝히고 싶은 정치 고(高)관심자였을까. 우연히 그때 짬이 났던 걸까. “대통령 위기에 보수가 전화를 더 받아 지지율 40%가 나왔다”는 주장은 보수층이 과다 대표됐고, 그만큼 평균적 민심과는 거리가 있다는 고백이기도 하다.제안 2: 반복 전화할 때라야 응답률 오른다 국제 기준을 도입하되, 대폭 줄어들 응답률은 예산과 시간을 더 들여 다시 올리면 된다. 제주 사례라면, 80명이 아니라 A∼O까지 15명에게만 전화를 거는 방법이 있다. 월요일에 안 받았다면 화요일 오전에 2차 통화를 시도하고, 화요일 저녁과 수요일 아침에 3차, 목요일에 4차, 5차 시도를 할 수 있다. 부재중 10명 빼고, 통화한 5명 중 1명이 설문에 답한다면 제주 응답률은 한국 기준 20%, 국제 기준 6.7%로 뛰어오른다. 필연적으로 면접조사원 수나 근무 일수가 늘어나고, 조사 비용이 2배 가까이 늘어날 수 있다. 높은 조사 비용을 감당하기 힘든 매체와 함께 ‘편향된 의도성 질문’은 자연스럽게 퇴장할 것이고, 조사 품질과 신뢰도가 함께 오를 수 있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일 신년사를 낭독하다가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많은 비판이 있는 걸 안다”고 운을 뗐다. “(한국은행) 간부들이 공보관을 통해 (총재가 신년사를) 그냥 읽고 오시고, 절대 애드립(즉흥 발언)하지 말라고 했는데, 한마디 안 할 수가 없다”면서 시작한 말이다. 이틀 전 최 권한대행은 헌법재판소 재판관 3명 임명을 거부하다가 탄핵당한 한덕수 전 대행과 달리, 그중 2명을 임명했다. 중앙은행 총재가 신년사에서 이런 민감한 정치 문제를 꺼낸 것이다. ▷이 총재는 “최 대행을 비판하려면, 특히 국무위원은 해외 신용평가사에 미칠 영향도 고려해 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신년사 직후 기자간담회 때는 한술 더 떠 “국무위원들은 경제 고민 좀 하고 얘기하라”고 했다. 헌재 재판관 임명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일정이 더는 늦춰지지 않도록 한 조치다. 지금 같은 환율 급등 국면에서 외국 투자자에게 한국의 안정성을 보여주는 데 필요한 일이었다. ▷이 총재의 발언은 지난해 12월 31일 국무회의에서 벌어진 ‘소동’을 겨냥한 것이다. 최 대행은 그날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사전에 예고가 없었던 헌재 재판관 임명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자 몇몇 장관이 “왜 상의도 없이 중대 사안을 발표하느냐”고 강하게 반발했다고 한다. 정치인 출신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 윤 대통령과 대학 동기인 유철환 국민권익위원장, 윤 대통령의 개인변호사였던 이완규 법제처장 등이라고 한다. 하지만 최 대행은 장관들과 동료인 경제부총리가 더 이상 아니다. 재판관 임명 여부는 대통령 권한대행의 권한이지, 토론해 정할 성격은 아니다. ▷이 총재가 해외 신용평가사를 거론한 건 국가 신용등급 때문이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 때 무디스, S&P 등 이름도 생소하던 글로벌 신용등급회사가 한국의 국가등급을 낮추는 일이 환율 폭등 및 차입금리 급등과 맞물려 진행되던 기억이 생생하다. 무디스는 12·3 계엄 직후 Aa2라는 우리 신용등급은 유지하면서도 “정치 사정에 따라 변동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총재는 자신이 10년 전 IMF 국장을 지내며 40여 아태 국가에 대한 경제리스크 보고서를 작성했던 책임자였기 때문에 더 민감했을 수 있다. ▷한국은행 총재는 발언이 금융시장에 미치는 파급력 때문에 말과 행동의 절제를 요구받는다. 이 총재는 이런 상식을 깨고 한은의 업무 영역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대학입시 문제에까지 의견을 내 왔다. 그의 행보를 놓고 “오지랖이 넓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국무위원들은 경제 고민 좀 하고 얘기하라”는 말의 내용에는 뭐라 토를 달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 경제는 ‘리스크의 지뢰밭’을 걷고 있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은 스스로 탄핵을 선택한 것이다. 또 권한대행의 대행이라는 전대미문의 혼란도 자기 의지로 선택한 것이다. 40년 공직생활 동안 변혁보다는 안정적 관리를 중시했고, 제3자건 역사건 누군가의 평가를 늘 신경 쓰면서 산 인물답지 않다. 그의 1차 책임은 선출된 대통령이 부재한 현 상황을 안정 속에 최대한 단축시키는 일이었다. 황당한 계엄을 실행에 옮긴 윤석열 대통령이 하루라도 국정의 책임자로 있어선 안 된다는 점에 대해 한 대행도 100% 동의할 것으로 확신한다.재판관 임명은 폭탄 돌리기 아니다 헌재 재판관 임명은 폭탄 돌리기 놀이처럼 작동할 일이 아니다. 그저 내 앞에서 터지거나, 다음으로 넘긴 뒤 터지길 바랄 일이 아니란 뜻이다. 40년 동안 장관, 청와대 수석, 대사, 부총리, 총리까지 안 해 본 게 없는 한덕수 대행이야말로 이런 고난도 문제를 풀 책무가 있다. 자기 손으로 재판관 3명을 임명했어야 했다. 관운이 억세게 좋았던 그에게 던져진 운명이라면 운명일 것이다. 한 대행은 폭탄을 다음 사람에게 넘기고 빠져나온 것에 가깝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이주호 사회부총리처럼 다음 순번 대행들이 헌재 재판관을 임명할지는 의문이다. 최 부총리는 어제 더불어민주당을 향해 “탄핵 재고”를 요청했고, 이주호 부총리는 입장문 발표 때 곁에 서 있었다. 1주일에 1명씩 국무위원 탄핵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는 민주당도 민주당이지만, 총리와 부총리가 이렇게 무책임해서 되겠나. 한 대행은 정치적 합의 필요성과 황교안 권한대행 관례를 거론하지만, 핑계일 뿐이다. 이런 코미디 같은 일을 바라보는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한 대행의 헌재 재판관 임명 거부는 시간을 끌어달라는 국민의힘 요청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이런저런 이유로 재판을 지연시켜 가며 승승장구했고, 조국 전 대표도 총선 2개월 전 내려진 2심 실형 선고 때 구속을 미뤄준 덕분에 국회의원이 됐다. 이러니 탄핵심리를 몇 개월이라도 지연시키는 게 대단한 불의가 아니라는 국민의힘 논리에 한 대행이 수긍했는지는 모르겠다. 여기에 본회의장 질의응답을 통해 민주당 의원 수십 명과 얼굴을 붉히며 숱하게 싸웠던 한 대행의 개인 경험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이것만으론 설명이 부족하다. 민주당 주장대로 대통령 욕심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한 대행은 계엄엔 반대했지만, 이번 폭탄 돌리기로 중도층 마음을 잃게 됐다. 무리수를 둬서라도 후보에 도전하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은 혹시 있을지 모를 조기 대선은 어렵더라도 5년 뒤 대선을 기약할 때라야 의미가 있다. 1949년생으로 지금 75세인 한 대행에게 5년 뒤란 없다. 윤 대통령과 나눈 의리와 우정이 변수일 수 있지만, 역시 큰 이유는 아닐 것 같다. 한 대행이 노무현의 총리, 윤석열의 총리를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대통령과 국정은 함께해도 이념적 동지가 되지는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노무현식 정치와 이념에 경도됐다면, 그가 노무현 퇴임 1년 만에 이명박 정부의 주미 대사직 제안을 수락하지 못했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계엄으로 탄핵과 수사를 앞둔 윤 대통령을 위해 역사적 혹평을 뒤집어썼을까 싶다.‘결단’ 못 내려 공직 40년이 빛바래다 옛사람들은 사람의 말보다는 그의 발길을 보라고 했다. 한 대행은 평생 국리민복을 다짐했겠지만, 그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났다. 우리 편 목소리와 해야 할 책무 사이에 낀 상태에서 책임 회피를 선택했다는 것 외엔 설명할 길이 없다. 공직에서 수많은 ‘결정’을 내렸던 그였지만, 인생을 건 ‘결단’을 강요받는 순간은 없었을 것이다. 그의 화려한 공직 경력이 폭탄을 다음 국무위원에게 넘긴 마지막 한 컷 때문에 빛바래게 됐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영국 일간지 더타임스가 윤석열 대통령을 맥베스로, 김건희 여사를 그의 부인 레이디 맥베스로 빗댄 기사를 썼다. 기사에 맥베스란 표현은 도입부 딱 한 문장에만 등장한다. 우리에게 춘향전이 그렇듯이, 영국 독자들에게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의 하나인 ‘맥베스(Macbeth)’는 설명이 필요 없나 보다. 서사(敍事)나 주인공 설명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편집자는 “한국인은 비상계엄 선포에 그들의 ‘레이디 맥베스’를 문제 삼는다”는 제목을 뽑았다. ▷‘맥베스’의 줄거리를 듣다 보면 한국 정치가 절묘하게 겹쳐진다. 충신 맥베스는 스코틀랜드 왕을 위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고, 최측근인 부관과 함께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귀로에 마녀 셋을 만나 들은 ‘왕이 될 운명’이란 말에 흔들렸다. 그가 머뭇거리자 아내 레이디 맥베스는 뭐가 두렵냐며 부추겼고, 그는 주군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왕국이 혼돈에 빠지는 동안 자신의 최측근 부관까지 제거하게 된다. 맥베스 부부는 비극적 운명을 맞았다. 정치인 문재인, 윤석열, 한동훈이 떠오른다는 이들이 많다. 김건희 여사도 함께. ▷영국 기자에겐 윤 대통령의 정치 입문에 관여한 김건희 여사가 레이디 맥베스로 보인 것 같다. 김 여사는 검찰총장인 남편 업무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후보 시절엔 핵심 참모 이상의 역할을 했다.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 “선거는 패밀리 비즈니스”라는 말까지 꺼냈다. 여기에 손바닥의 왕(王)자, 김 여사가 유튜버 방송 기자의 손금을 봐 주며 “내가 잘 보죠”라고 말하는 영상, 하얀 수염의 풍수전문가까지 등장했다. 셰익스피어 작품 속 ‘예언’처럼 무대에 올릴 만한 요소가 갖춰졌다. ▷윤 대통령은 왜 반헌법적인 데다 황당하기까지 한 비상계엄을 실행에 옮겼을까. 총선 전부터 지나가는 말처럼 “야당이 저러면, 계엄으로 정리하면 되지”라고 말하곤 했다는 얘기가 용산 안팎에서 들린다. 윤 대통령은 “민주당의 국정 방해”를 이유로 댔다. 설사 그렇더라도 군을 국회에 투입하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김건희 특검법과 명태균 음성파일에서 아내를 보호하기 위한 것 아닐까 하는 추측이 끊이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맥베스 비유를 먼저 꺼낸 것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다. 2021년, 2024년 2번이나 공개적으로 ‘맥베스 부부의 비극적 최후’를 거론했다. 대문호지만, 셰익스피어가 쓴 작품들은 요즘 기준으로 봐도 ‘이런 막장 드라마가 없다’고 평가받는다. 진짜 기가 막히는 일은 400년이 지난 한국에서 그런 막장이 현실로 살아난 듯하고, 적잖은 영국 독자들이 한국 정치를 흥밋거리처럼 바라보게 됐다는 점이다. 궁지에 몰린 대통령 부부의 처지가 셰익스피어쯤 되어야 할 수 있는 창작처럼 느껴진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윤석열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22년 5월 언론은 대통령의 출근 시간을 추적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자택을 나선 시각은 취임 첫 3일 동안 오전 8시 31분, 9시 12분, 9시 55분이었다. “공무원 기준으론 지각”이란 비판이 나왔다. 대통령실은 “대통령은 24시간 근무한다”고 반박했고, 곧 정권 초기의 대형 이슈들에 묻혀 버렸다. 참모의 말엔 귀 닫은 채 회의시간을 독점하고, 잦은 음주 풍문 속에 국정에 몰입하지 못한다는 증언이 이어지는 오늘의 ‘탄핵 전야’에 돌이켜볼 때, 예사롭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한 언론이 집권 후반기를 맞은 11월 한 달의 출근 시간을 관찰했다. 11일 보도에 따르면 주말과 남미 순방을 뺀 18일 가운데 대통령이 오전 9시 이전에 용산 집무실에 도착한 건 이틀뿐이었다. 이래서야 국정의 컨트롤타워인 대통령실 업무 기강이 제대로 섰을까 싶다. 정작 더 큰 문제는 경호처가 언제부턴가 ‘가짜 출근차’를 동원한 듯한 장면이다. ▷언론의 지난달 25일 취재를 보자. 그날 오전 한남동 관저에서 검은색 고급 승용차 3, 4대와 승합차 3∼5대로 구성된 차량군이 2차례 빠져나왔다. 경찰 오토바이 경호가 뒤따랐다. 각각 오전 8시 52분과 9시 42분이었고, 도착지는 용산 대통령실이었다고 한다. 차량 규모로 볼 때 대통령과 수행원, 경호팀이 출근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이런 일은 29일에도, 12월 3일에도 있었다고 한다. 대통령이 2번 출근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달랐던 것은 경찰의 태도였다. 첫째 행렬을 맞을 때 경찰은 호루라기로 주변 차량을 통제했고, 길목에 선 경찰은 서로 잡담했다는 것이다. 둘째 행렬 땐 사복 경찰이 추가로 배치됐고, ‘표준 교통신호제어기’ 뚜껑을 열어놓고 언제든 신호등 변동을 할 태세였다. 경찰청 폐쇄회로(CC)TV도 첫 번째와 달리 두 번째엔 차량들이 한남동 관저를 나설 때 카메라가 차량에 집중되고 화면은 확대됐다. 이동할 때는 카메라가 차량을 추적했다고 한다. 논란이 커지자 경찰 내부에서는 요인 경호 때 위장용으로 빈 차를 내보내는 ‘공차’ 방식을 늦은 출근에 활용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반헌법적 비상계엄과 정치인 체포령까지 불거진 마당에 이런 일은 사소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취재가 사실이라면 사안의 크기는 달라도 본질은 다르지 않다. 언론의 출근 시간 추적이 부담스럽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든가 출근 시간을 앞당기면 된다. 쉽고 삿된 길을 택해서 들어간 시간과 인력 낭비는 어쩔 것인가. 첫 번째 빈 차 행렬의 운전자와 탑승자들은 ‘위장용 출근 쇼’에 얼마나 어처구니없어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경호처가 “경호 보안상 이유”라며 입을 닫을 게 아니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윤석열 대통령 탄핵 표결 정국에서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생각을 180도 틀었다. “계엄은 위헌적이나, 탄핵은 불가”였던 그가 6일 갑자기 “대통령 직무 정지가 필요하다”는 쪽으로 돌아섰다. 계엄이 선포된 3일 밤 군이 정치인 체포를 시도했고, 윤 대통령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이른바 ‘체포 리스트’가 있었다는 주장인데, 사실로 확인된다면 정치권 지축을 뒤흔들 일이다. ▷‘체포 시도설’은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의 입에서 시작됐다. 계엄이 무산된 직후 석연찮은 이유로 사직한 홍 전 차장은 6일 민간인 신분으로 국회 정보위에 출석했다. 그 자리에서 3일 밤 대통령과 충암고 출신인 여인형 방첩사령관과 통화한 내용을 공개했다. 윤 대통령이 “정치인들을 잡아들여 싹 다 정리하라. (민주당이 경찰에 넘긴) 대공수사권을 국정원에 돌려줄 테니 방첩사를 도우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고 했다. 계엄 발표 20분쯤 뒤였다. ▷홍 차장은 곧바로 방첩사령관과 통화했는데, 체포 대상 정치인 이름을 불러줘 받아 적었다고 했다. 이재명, 우원식, 한동훈, 김민석, 박찬대, 정청래, 조국, 김어준, 김명수(전 대법원장), 김민웅(김민석 의원 친형), 권순일(전 대법관)… 순서였다고 했다. 홍 차장은 “여기까지 받아 적다가 미친 ×이구나 생각해 멈췄다”고 국회에서 말했다. 이름이 기억 안 나는 선관위원 1명, 민노총 또는 한노총 위원장 1명이 더 포함됐다고 했다. 계엄법상 현역 의원은 현행범이 아니면 체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불법성을 다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재명 박찬대 등 야당 지도부 말고도 집권 여당의 한동훈 대표까지 체포 대상에 올랐다면 놀라운 일이다. 한 대표는 5일 대통령 면담 때 “왜 국회에 투입된 군이 나를 체포하려 했느냐”고 따진 적이 있다. 여기에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김명수 전 대법원장은 왜 거론됐는지 의문이다. 권순일 전 대법관은 대장동 사건의 김만배 씨와 깊은 인연이 있는 인물이다. 친야 방송인인 김어준 씨는 여론조사 ‘꽃’을 통해 총선 여론조사 조작 가능성을 따지려 한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홍 전 차장에 따르면 방첩사는 그날 밤 체포조를 투입했는데 정치인 위치를 못 찾아내자, 자신에게 휴대전화 위치 추적을 요청했다고 한다. 체포한 뒤 경기 과천에 구금하는 계획도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아무런 조치를 않았다”며 무관함을 주장했는데, 수사로 가릴 일이다. 그가 어마어마한 통화 내용을 직속 상관인 조태용 국정원장에게 보고했는지를 두고도 양쪽 진술이 엇갈린다. 역사에 가정은 필요 없다지만, 최초의 체포 계획이 성사됐다면 어떤 일이 이어졌을까. 2차, 3차 체포 리스트가 없으리란 법도 없으니, 얼마나 많은 피해자가 나왔을지 상상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일이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해외 언론의 한국 보도는 때때로 바깥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알 수 있는 창을 열어준다.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도 그랬다. 긴급 상황을 사실 위주로 다루던 외신 보도에서 비판적 견해가 늘어났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4일 “윤 대통령은 즉각 사임하라”면서 “윤 대통령은 한국 같은 주요국 대통령직은 물론이고 어떤 자리에도 안 맞다(unfit)는 걸 입증했다”는 주장이 담긴 익명의 칼럼을 실었다. 이코노미스트는 자사의 모든 글에는 회사의 집단지성이 담겼다는 이유로 글쓴이 이름을 공개하지 않는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계엄 선포를 “미국의 (한미일) 태평양 동맹을 위협할 만한 행동”이라고 평가했다. 그런 뒤 “윤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아메리칸 파이’ 노래를 부르던 시절은 갔다”고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자사 칼럼니스트 3인의 대화 형식의 글을 실었다. 거기에는 계엄 선포를 “완전한 오판”으로 평가하고, “대통령은 누구와 상의했고, 누구의 조언을 들었나. 그것이 1만 달러짜리 질문”이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한국의 국격과 민주주의 성숙도에 비춰볼 때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었다. ▷언론사의 공식 견해인 사설도 여럿 등장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첫날 “민주국가에서 있어선 안 될 사태가 한국서 벌어졌다”는 사설을 쓴 데 이어 이튿날에도 “윤 대통령은 북한과 긴장이 지속되는 한반도 정세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고 썼다. 워싱턴포스트는 “뻔뻔하고도, 위헌적으로 보이는 (민주주의) 전복 시도가 한국 민주주의를 진짜 위협했다”고 평가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힘들게 이룬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험에 빠뜨린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견을 폈다. ▷언론뿐만 아니라 한반도 정책을 다루는 미국의 싱크탱크도 의견을 표명했다. 워싱턴 소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윤 대통령의 종말(demise)을 부를 수 있다”고 예측했고, 스팀슨센터는 “정치적 자살행위”라고 평가했다. 미 국무부 부장관이 이례적으로 이번 일을 “심각한 오판”이라고 비판한 것과도 맥을 같이하는 견해들이다. 미국은 한국을 일본과 함께 ‘권위주의 중국’의 팽창을 막는 핵심 동맹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안보 전문가들의 아쉬움이 컸을 것이다. ▷한국은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국 가운데 경제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성숙시킨 유일한 국가다. 미 블룸버그통신이 “민주주의의 등대로 여겨졌던 한국에서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고 묘사한 것도 그런 이유다. 대통령 한 사람의 독단이 오랜 시간 쌓아올린 한국의 국격에 손상을 입혔다는 것은 외신의 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민주적 절차를 통해 해법을 마련하고, 이것이 외신을 통해 보도되는 것을 지켜보는 방법밖에 없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권한은 많고 책임은 없다’는 말을 듣는 국회의원도 때로는 벌거벗고 광야에 설 때가 있다.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에겐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직후가 그랬다. 찬반에 대한 본인 생각을 드러내고 평가받아야 할 순간이 왔던 것이다. 국회는 4일 오전 1시쯤 계엄해제 요구 결의안 표결을 진행했다. 투표 참석자 190명 전원이 찬성했는데, 여당 소속은 18명이었다. 시대착오적인 계엄에 반대한다는 숫자가 108명 의원 가운데 5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비슷한 시각 국회 건너편 국민의힘 중앙당사에는 여당 의원이 50명 넘게 모여 있었다. 표결에 불참한 이들로, 당 주류에 가까운 의원들이 상당수였다. 이들은 추경호 원내대표의 오락가락 지시로 혼란을 겪었다고 했다. 원내대표 이름의 공식 집결 지시는 3일 오후 11시 이후 2시간 동안 ‘즉시 국회→중앙당사 3층→국회 예결위 회의장→당사 3층’으로 계속 달라졌다. 그러는 사이에 투표는 끝나버렸다.▷당사에 모인 의원들은 “대체 뭔 일이 벌어진 거냐”며 우왕좌왕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더불어민주당이 8월 이후 계엄설을 제기하기 시작했고, 45년 만에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는데도 상당수 집권당 의원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관찰자에 가깝게 행동했다는 뜻이다. 그러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의결정족수를 채웠다고 선포하는 장면이 TV에 나오고 국회 표결 처리가 임박하자 몇몇 의원이 “계엄은 안 될 일” “대통령은 왜 성사도 못 시킬 계엄을 선포했느냐”는 등의 말을 주고받았다고 한다.▷추 원내대표는 의원들을 당사로 집결시켜 놓고는 국회 본청 원내대표실에 장시간 머물렀다. 본회의장까지 3, 4분 거리였지만 회의장에 가지 않았다. 계엄 선포를 사전에 알지 못했다는 그는 상황 파악에만 주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표결 불참에 대해선 “내 판단으로 안 했다”고 했다. 친한계인 김종혁 최고위원은 “추 원내대표는 본회의장으로 오라는 한 대표의 말을 거부했다”는 말까지 했다. 추 대표는 4일 새벽 상황에서나, 이날 오전 열린 의총에서도 공식적으로 계엄의 문제점을 거론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에 이어 국민의힘 의원들도 역사와 민심의 평가 무대에 오를 처지에 놓였다. 의원들은 계엄 해제 표결에 왜 참여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질문받게 될 것이다. 표결 불참자 중 일부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반대의 뜻을 밝혔지만, 당사에 머물던 범주류 의원 50여 명은 어떤 정치적 의사표시도 내놓지 않았다. 어떤 의원들은 계엄군이 국회에 진입한 상황에서 계엄 해제 표결을 위해 담을 넘어서까지 본회의장을 찾았고, 어떤 의원들은 제3자처럼 TV로 본회의장 표결을 지켜보며 개인적 논평을 했을 뿐이다. 극명하게 엇갈린 장면이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더불어민주당이 내년 예산안 가운데 검찰, 경찰, 감사원, 대통령실의 특수활동비를 전액 삭감하겠다고 나섰다. 국회 예결위에서 표결까지 마친 상태다. 특활비는 영수증 증빙 없이 쓰는 현금성 예산으로, 이들 4곳을 합치면 특활비 삭감액은 200억 원에 가깝다. 또 소액이 아니면 영수증이 필요한 특정업무경비(특경비) 예산도 대폭 삭감됐다. 이걸 포함하면 잘려나간 예산이 1000억 원에 이른다. ▷경찰 수사로 예를 들어보자. 불법 사채조직 정보원에게 ‘현금 수고비’를 줬다면 특활비에서 충당한다. 지방 출장 때 신용카드로 렌터카를 빌렸다면 특경비에 해당한다. 두 항목 모두 큰 틀에서 수사비의 일부인 것이다. 실제로 현금이 종종 쓰인다고 한다. 예컨대, 함정수사 차원에서 마약대금 500만 원을 비트코인으로 지급하거나, 성 착취물 사이트에 가입할 때가 그렇다. 민주당의 삭감 결정은 실제로도 특활비를 설명한 대로만 쓰느냐는 의문에서 출발했다. “검찰, 감사원 등 ‘힘센 조직’일수록 국민 세금을 쌈짓돈처럼 쓸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그 근거로 검찰의 특활비 내역에서 찾아낸 반복적 현상을 거론한다. 매달 같은 액수가 지급되는 경우가 잦아 ‘검사들끼리 나눠 갖기’가 의심되고, 추석이나 설 직전에 사용액이 늘어나니 떡값이 아니냐는 의문인 것이다. 2017년 이영렬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이 특활비로 돈봉투를 돌린 일이 드러난 뒤 검찰은 관행을 바꾸겠다고 다짐했지만, 확인된 것은 아직 없다. ▷검찰은 올 9월 국정감사 때 특활비 내역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법원 가이드라인을 따랐다지만 내용이 부실했다. 수령인과 금액만 남겼을 뿐 날짜와 용도 등은 지운 채였다. 민주당은 “기관장 금일봉처럼 안 썼다는 걸 입증만 하면 예산을 주겠다”고 했지만, 뾰족한 설명이 없었다. 문제는 국회도 특활비(9억 원)와 특경비(185억 원)를 내년에 책정했는데, 외유성 짙은 의원들의 해외 출장 등에 이 돈을 쓴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는 점이다. 민주당은 자신들이 수혜자인 국회 예산은 물론이고 형사재판으로 얽힌 대법원의 특활비는 손대지 않았다. ▷민주당은 특활비 삭감을 국민 세금의 투명성 확보 노력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자신들이 수사받고 감사받은 기관들을 겨냥한 분풀이라고 맞서고 있다. 그 성격이 무엇이건, 국민 세금을 200억 원 가까이 현금으로 쓰는 관행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검찰과 경찰은 지난 수년간 특활비와 특경비 총액은 비슷하게 유지하면서도, 현금성 특활비는 줄이고 영수증이 필요한 특경비는 늘려 왔다고 설명한다. 이번 ‘삭감 정국’의 결론과 무관하게, 현금 사용은 최대한 줄여나가는 것이 부패를 방지하고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는 길이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정치 투쟁용 탄핵, 무책임한 계파 싸움, 기획 방탄, 가족의 국정 개입 뉴스가 나라를 뒤덮고 있다. 하나하나가 충격적인데, 태연하게 반복되는 것이 놀랍다. 누구는 1987년 헌법이 소명을 다했다며 제왕적 대통령제를 손보는 개헌을 주문한다. 다른 누구는 선출직과 고위 공직을 노리는 이들 중 상당수가 평균 한국인에 못 미친다면서 사람을 바꾸는 ‘정치 교체’가 시급하다고 말한다.새로운 질문: 누가 정치를 해야 하나대개의 유권자들은 알 만큼 알게 됐다. 정당의 선출직 공천이 공공선 인재를 찾는 것 말고도 사적 목적이 개입된다는 것을. 공천 결정권자와 그 대리인들은 눈 딱 감고 나를 도울 내 편을 먼저 찾곤 한다는 것을. 김영선 전 의원이 어떻게 공천받았는지도 대충 드러났고, 박용진 의원을 배제하기 위한 3차례 경선도 많은 걸 말해줬다. 임명직이라고 다르지 않다. “(질문이) 무례하다”는 정무수석, “대통령과 친 골프는 로또”라는 국방장관이 등장했다. 월광소나타 피아노 연주를 한 뒤 청와대 대변인에 발탁되는 일도 있었으니 보수-진보 구분과 무관한 일이다.그럼 누가 정무직 공직을 맡아야 하나. 이젠 이 질문에 답을 찾아야 할 때다. 그동안 보수정당은 스펙 좋은 사람을 인재로 여겼고, 민주당은 운동권 경험에 가산점을 듬뿍 줬다. 이제 정치 개혁은 어느 정치집단이 좋은 인재 모델을 찾는지에 모아져야 한다. 새 기준에 맞춰 뺄 사람 빼고, 좋은 사람은 아무리 고사해도 모셔 오는 노력으로 미리미리 승부 걸어야 한다. 총선 6개월 전부터 찾는다고 찾아질 리가 없다.공공 리더의 기준이 하나일 수는 없다. 하지만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의 경험은 하나의 기준을 제시한다. 나라 안에서는 소련 붕괴의 책임자로 욕먹지만, 밖에서는 사회 개혁과 정치적 개방을 ‘시도’하면서 역사를 바꾼 인물이다. 고르바초프는 억압적 체제 내 엘리트였다. 40대 후반에 농업 분야 총책임자(서기)가 됐고, 최연소 공산당 정치국원이 됐다. 브레즈네프라는 어둠의 서기장을 공개된 자리에서 칭찬했고, 아부했다는 기록이 넘친다. 그랬으니 이견 없이 체르넨코의 후임으로 1985년 봄 1인자에 올랐을 것이다. 겉으론 그랬지만, 고르바초프의 마음에선 농업을 책임지면서 갖게 된 소련 변혁의 꿈이 커가고 있었다.그는 1980년대 초반 자신이 훗날 외교장관으로 발탁한 친구 셰바르드나제와 흑해 휴양지에서 겨울 휴가를 보냈다. 그때 둘은 긴 소나무 숲 산책로를 걸으며 “농민의 추가 노력으로 더 생산한 몫은 인센티브로 줘야 한다. 안 그러면 소련 농업과 체제에 미래는 없다”는 대화를 나눴다. 반역에 가까운 토로였다. 그대로만 가면 미래가 창창한 둘이었지만, 변화를 통해 조국을 올바른 궤도에 올리고 싶어 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자기를 잊었다는 점에서 ‘고르바초프 모먼트’라 불릴 만했다.반대자 비판만으로는 ‘정치 부적격’당신이 정치인이라면 지난 몇 년 사이에 정치적 동지들과 무엇을 주로 대화했는지 되돌아 봄직하다. 다음 공천 가능성, 상대 정파 험담, 상대 정당 흉보기에 머물렀다면 어쩌면 당신의 시대는 저물고 있는지 모른다. 스스로가 가장 잘 알 것이다.정치와 멀리 있더라도 이 질문은 유효하다. 은행원, 중학교 교사, 엔지니어일지라도 관계없다. 사회를 번듯하게 세워 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있는가. ‘고르바초프 모먼트’를 경험했다면 최소한의, 그러나 꼭 필요한 공직자 조건을 지녔다는 뜻이다. 정당이 찾아나서야 할 인재들은 이런 경험자들 아닌가. 정당이 게으름 피우면 지금 같은 정치를 계속 견뎌야 한다. 하향 평준화한 정치가 정말 필요한 인재들의 도전을 막는 걸 언제까지 기다려 줘야 하나.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정대철 헌정회장은 영원한 ‘민주당 사람’이다. 민주당 대표를 지내기도 했을 뿐 아니라 부친 정일형 박사와 아들 정호준 전 의원을 포함해 3대가 도합 14번 국회의원을 지내며 민주당에 깊이 뿌리내렸다. 정 회장은 그럼에도 민주당 울타리를 넘어 여야 정치인들과 두루 격의 없는 소통을 이어 온 ‘광폭 정치인’이다. 윤석열 대통령과도 20년 넘게 친분을 쌓았다. 23일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정 회장은 윤 대통령을 “정의로운 검사였다”라고 기억했고 동시에 “준비 부족으로 국정이 낙제점”이라고 비판했다. 비주류가 말살된 민주당에도 쓴소리를 했다. 정 회장은 혼란스러운 요즘 정치를 바라보며 정치 개혁을 위해 대통령 권한을 분산하는 개헌을 여생의 과제로 여기고 있다고 했다. 헌정회가 27일 국회에서 개헌 토론회를 여는 것도 이런 이유다.》―윤 대통령과의 친분은…. “오래전 검사라면서 전화를 걸어와 가슴이 철렁했다. 만났더니 ‘제가 검찰의 정대철입니다’라고 하더라. 주변과 소통하는 걸 즐기고, 얼굴도 커서 그렇게 불린다고 해서 웃었던 기억이 있다. 서울대 법대 17, 18년쯤 후배인데…. 2016년 국정농단 특검 즈음부터 더 자주 만났다. 그 특검보 윤석열이 몇 년 뒤 대통령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 둘이 만난 건 100번인지 200번인지 생각도 안 난다. 당선 후에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 등과 식사를 한번 했다.” ―검사 윤석열은 어땠나.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걸 말투에서 느꼈다. ‘그건 옳지 않은 일이다’라는 식으로 말했다. 그때 만남이 끝날 무렵 차를 갖고 남편을 데리러 오곤 했던 김건희 여사도 알게 됐다.” ―윤 대통령에게 정치 입문을 권했다는 것이 맞나. “내가 안철수 의원의 국민의당에 잠시 가 있었던 때가 있다. 그때 부장검사였던 대통령을 안 의원에게 비례대표 후보로 추천했다. 처음엔 뜻이 있는 것 같다가 공천 때가 되니까 거절했다. ‘정치를 하면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수사로 좌천된 일 등) 내가 한 일이 정치하려고 한 것처럼 비칠 수 있다’고 했다. 안 대표가 직접 들어보겠다고 해서 셋이서 만났다. 그때만 해도 윤 검사가 안 대표에게 90도 인사할 정도로 깍듯했다. 안 대표는 10번, 20번 설득하다가 포기했다. 그로부터 6년 뒤 두 사람이 대선 때 단일화해 윤 검사가 대통령이 됐다. 정말 세상일은 모르겠더라.” ―검사 시절의 정의감이 국정에선 덜 느껴진다.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대통령은 국정에 성공하지 못했다. 정치와 친하지 못하고, 준비 부족 탓이겠지만 국정 철학과 목표가 분명하지 않았다. 상명하복이 지배하는 검찰 출신으로 민주적 대화, 타협, 조정에 익숙지 않았을 것이다. 또 부인 문제까지 생겼다. 최근 기자회견을 봤는데 변명만 했다. 국민적 요구가 뭔지 알고 있는지 걱정스러웠다.” ―대통령이 되면 왜 이렇게 달라지나. “(인사 예산 등) 다른 권한보다 대통령을 가장 자신만만하게 만드는 것은 정보라고 본다. 자신이 세상일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오만해진다.” ―윤 대통령은 “정치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었다. 뭘 했어야 했나. “대통령이 야당 대표를 딱 한 번 만났다. 내가 내부 사정을 들어보니까, 대통령은 사법 리스크가 끝난 뒤 만나겠다는 생각인 것 같다. 무죄 추정이 필요한데, 검사 출신 대통령이 비법률적인 사고를 한다. 야당 대표를 안 만나겠다면 야당 중진이나 상임위원장을 초청해 밥을 먹어야 한다. 취임 2년 반 동안 이런 자리가 한 번도 없었다고 들었다.” ―대통령은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하지 않나. “정치 현실에 와 보니까 정치인들이 나쁘다는 생각이 더 강해진 것 같다. 국가를 사랑하지 않고,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하는 존재로 야당을 봤다는 뜻이다. 하지만 야당은 반대하는 집단이다. 설득할 수 있다는 마음의 여유가 대통령에게 필요한데, 그거 없어 걱정이다. 대통령은 더불어민주당을 불순 세력으로 보고, 야당은 보수 정당을 시대착오적 퇴행 집단으로 본다. 야당은 툭하면 법안 강행 처리하고, 대통령은 거부권을 법률안 24건에 썼다. 이렇게 여야가 자기 힘을 과시하는 정치는 없었다. 그렇더라도 대통령 책임제에선 대통령은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가장 먼저, 또 크게 느껴야 한다. 내가 알던 윤 대통령은 취임하고 보니까 정치 친화적이지 못했다.” ―정치 친화적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내가 문재인 대통령 시절 우연히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났다. 그가 ‘김대중 대통령(DJ)을 존경한다’고 했다. 대통령이 된 뒤 자신을 초청한 뒤 국정 경험을 듣겠다고 수첩을 펼쳐놓고 질문하더란다. 그렇게 5번을 초청했다고 했다. 전두환의 조언을 DJ가 따랐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DJ는 정적의 딸이었던 박근혜 의원도 초청했고, 아버지를 용서한다고 말했다. 이런 걸 두고 쇼라고 해도 좋다. 또 쇼 한두 번으로 국민들은 감동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하지만 지켜보는 국민들은 싫어하지 않는다. 지금 대통령은 자신이 옳고, 이재명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겠지. 설혹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지금의 여야의 만남이 절박하다면 자기 생각을 뛰어넘어야 한다.” ―지금 꽉 막힌 정국을 풀려면…. “지금 정국을 돌파하려면 연립정권 비슷한 방식 아니면 어렵다. 국무총리 추천은 야당에 맡길 각오를 해야 한다. 언론에서 거론되는 김한길 박주선 등 민주당을 떠난 분들이 국회 표결을 통과하겠나. 기자회견 때 ‘전광판을 보지 않는다’고 했는데, 전광판을 자세히, 그리고 자주 봐야 한다.” ―김 여사 해법은 뭔가. “대통령이 읍참마속 심정으로 특검을 받아야 한다.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은 아들 구속을 좋아서 했겠나. 국민이 원한다면 해야 하는 게 정치다. 민주당도 특검 선정을 마음대로 하겠다는 걸 양보해야 한다. 특검이 여야 상황 다 참고해서 수사할 텐데. 그 정도 양보는 해야 한다.” ―헌정회장으로서 개헌 토론회를 연다는데 무엇을 고쳐야 하나. “대통령은 제왕적이다.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거 빼곤 다 가능하다고 말하지 않나. (외치는 대통령, 내치는 총리가 하는) 이원집정부제를 도입하든, 재임 중 중간평가 같은 선거를 더 치르게 하는 4년 중임 대통령제를 도입하든 대통령 권한 분산이 필요하다. 나는 내각제를 더 선호하지만, 민심이 내각제에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국회에 내각 불신임 권한을 주고, 대통령에게는 국회 해산권을 줘 상호 견제하는 걸 생각할 수는 있다.” ―대통령 권한 축소도 중요하지만 국회에 대한 불신도 크다. “국회의원도 통제받아야 한다. 의원 국민소환제를 헌법에 넣을 수 있다. 지방자치에 있는 주민소환제도와 비슷한 것이다. 막 나가는 의원을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국회의 윤리심사 기능을 강화하는 게 중요하다. 자문단도 설치해서 윤리심사 때 의원단 간섭을 배제해야 한다. 하지만 국회는 그나마 있던 상설 윤리위원회도 없앴다. 자기들끼리 불편한 걸 없애버리며 퇴행했다.” ―개헌을 여러 번 시도했지만, 유력한 다음 대통령 후보자가 반대한다. “1987년 개헌 이후 37년이 흘렀다. 그사이에 저출산, 고령화, 양극화, 기후변화, 지방소멸, 남북관계 변화 등 개헌 필요성이 많아졌다. 개헌해야 할 절박성이 있다. 가장 시급한 사유는 제왕적 대통령 문제다. 그래서 개헌의 때가 왔다는 공감대가 생겼고, 국회의원 사이에 소명의식이 느껴진다. 가장 큰 정치 개혁은 개헌이구나 하는 소명 말이다.” ―1987년 개헌은 민주화 열기가 응축된 결과였다. 개헌 요소가 많으면 어렵지 않을까. “개헌은 중요한 곳에 집중해야 한다. 줄줄이 다 고치려면 백년하세월이다. 권력구조 개편과 지방분권 등 2가지가 핵심인데, 가능한 부분, 합의된 부분만이라도 해야 한다. 절박한 정치 개혁을 위해선 개헌이 돌파구라고 우리 헌정회는 생각한다.” -임기 단축 개헌 주장도 나오는데…. “윤 대통령이 이렇게 임기를 마치면 낙제점이다. 정치 개혁 과제인 개헌을 대통령이 만들어 내면 된다. 다만, 지금 대통령의 임기를 단축하는 것은 논란이 크다. 여당은 탄핵의 변형이자 이재명 대통령 만들기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개헌을 하더라도 임기 단축은 다음 대통령부터 적용하면 된다. 여소야대를 막기 위해 대선과 총선을 비슷한 때 치르는 것도 필요하다.” ―지금 여야 싸움은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나. “여야 싸움을 줄이려면 국회법이라도 고치는 건 어떨까. 싫더라도 만나서 대화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여야 상설 정책협의체를 만들어 1년에 몇 번 이상은 협의해야 한다는 강제 조항을 넣자는 학자들도 있다. 영국 독일 미국처럼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 지정석이 아니라 입장하는 순서대로 섞어 앉으면 어떨까.” ―170석 민주당은 제 역할을 하고 있나. “이재명 대표는 달라져야 한다. 사법 리스크와 당을 너무 묶어 놓았다. 이 대표가 내 문제는 따로 해결할 테니 민주당은 해방되라고 선언해야 한다. DJ였다면 벌써 대표직 던졌을 거다. 그러면 당도 더 고마워하고, 본인도 더 빛나게 된다. 1955년 민주당 창당 이래 비주류가 없는 건 지금이 처음이다. 내가 민주당 대표 할 때도 비주류를 위해 3, 4할은 남겨놓았다. 지금은 국회의원도 올바른 얘기를 못 하게 됐다. 이재명의 결단, 의원과 당원의 결단이 동시에 필요하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만들기로 한 ‘정부 혁신 기구’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그 조직의 공동 대표로 지명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창업자(53)와 공화당 대선 주자였던 인도계 억만장자 비벡 라마스와미(39)는 20일 신문 기고를 통해 “작은 정부 십자군”이 조직을 주도할 것이라고 밝혔다. 머스크가 구인 공고를 냈던 “무보수로 주당 80시간 일할 매우 높은 IQ 소유자들”이 그들이다. 12세기 전후로 십자가를 품고 이슬람 정벌에 나섰던 기독교 기사단을 뜻하는 십자군이란 표현이 눈에 띈다. 물러서지 않겠다는 머스크의 결기와 기존의 엘리트 공무원을 적대시하는 트럼프의 생각이 묻어난다. ▷머스크와 라마스와미는 재택근무 중단과 규제 개혁을 제시했다. 코로나 때 정착한 재택근무를 폐지해 주 5일 출근을 불편하게 느끼는 공직자에게 퇴직을 유도하겠다고 했다. 연방 공무원 230만 명 가운데 110만 명이 재택근무가 가능하고, 23만 명은 100% 재택근무를 해도 된다고 한다. 머스크는 또 행정 규제를 철폐해 부처마다 규제 담당자 숫자를 크게 줄이고, 연방 정부 조직을 수도 워싱턴 밖으로 옮겨 공직자 퇴직을 유도하겠다고도 했다. ▷누구나 공감하지만, 손대지 못한 것이 정부 개혁이다. 하지만 두 억만장자의 생각은 다른 듯하다. 머스크는 400개가 넘는 정부 기구를 99개로 줄일 수 있고, 국민 세금을 매년 2조 달러(약 2800조 원) 절감할 수 있다고 말해 왔다. 라마스와미 역시 주(州) 경찰 및 교육자치청과 업무가 겹치는 연방수사국(FBI)과 교육부 폐지를 요구해 왔다. 이들의 주장은 “정부는 문제를 풀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 그 자체”라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취임사와 맥을 잇는 것이다. ▷미 언론 댓글에선 놀라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눈에 띈다. 두 사람이 각각 전기차 혁신과 신약 개발 투자로 어마어마한 성취를 이뤘지만, 이들의 성공 공식이 정부 개혁에 그대로 적용될지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머스크는 업무에 관한 한 자신에게 가혹하고,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다고 그를 2년간 관찰한 전기작가는 기록했다. 게다가 이들 둘은 남들이 나만큼 우수하지 못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는 천재형 창업가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부 개혁을 “우리 시대의 맨해튼 프로젝트”로 부른다. 미국이 핵 개발에 성공하면서 전쟁과 국제 관계를 송두리째 바꿔놓은 것처럼 자신도 그만한 변혁의 주도자로 기억되고 싶은 것이다. 트럼프나 머스크나 결국 상식을 뛰어넘되 지나치지 말아야 하는 모순적 과제가 주어졌다. 머스크는 “(개혁 저항 세력에) 망치가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망치를 가진 자에게는 무엇이든 못으로 보인다’는 미국 속담이 있다. 머스크의 성공 여부는 그가 얼마나 망치를 섬세하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오늘(19일)로 개전 1000일을 맞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불공정 전쟁’의 대명사로 기록될 듯하다. 우크라이나는 서방에서 공격용 무기를 제공받았지만 국경 너머의 러시아 목표물을 공격할 수 없고, 자국에 들어온 적에게만 쓸 수 있다. 덴마크 네덜란드가 준 전투기 F-16도 그렇고, 미국의 지대지 미사일(에이태큼스)도 그랬다. “러시아 내부를 때리면 무기 공여국을 교전국으로 간주한다”는 러시아의 엄포 때문이다. 반면 러시아엔 제약이 없다. 1945년 미국의 첫 핵실험 이후 핵무장국은 본토를 공격받은 일이 없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1000일이 지나서야 사거리 300km인 에이태큼스로 러시아 영토를 공격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1차 목표는 러시아 땅 쿠르스크 내 러시아 및 북한군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쿠르스크 지역은 영토 20%를 러시아에 빼앗긴 우크라이나가 유일하게 러시아 내부로 진격한 곳으로, 러시아는 북한 병사 1만2000명을 이곳에 투입했다. 2022년 2월 개전 이후 우크라이나를 방치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화끈하게 돕지도 않았던 바이든이 퇴임 2개월을 앞두고 이렇게 결정한 건 내년 1월 취임하는 도널드 트럼프를 의식한 결과로 해석된다. ▷트럼프는 ‘취임 직후 전쟁 중단’을 공언해 왔다. 트럼프 캠프의 휴전 구상은 ‘지금 위치에서 총을 내려놓고 현재의 전선에 비무장지대(DMZ)를 설치하고, 우크라이나는 20년간 나토에 가입하지 않는 대신 미국은 방어용 무기를 제공한다’는 내용이다. 국제사회는 물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국도 전쟁 피로감이 커진 건 사실이다. 특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전쟁 장기화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인명 피해가 컸다. 유엔 추정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11만5000명이 사망하고, 50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 우크라이나군은 절반쯤 되는 5만7000명이 전사했고, 25만 명이 다쳤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트럼프발 휴전 가능성은 전쟁을 더 뜨겁게 달구고 있다. 쿠르스크가 최대 격전지로 부상하고 있다. 북한군이 이미 투입됐고, 미국이 장거리 미사일 공격을 허용한 곳이다. 북한군이 여기로 자주포 50문, 방사포 20문을 갖고 왔다는 보도도 나왔다. 미 당국은 미사일 공격을 허가하면서 “참전한 북한군이 위험해졌다. 북한에 추가 파병을 멈추라는 메시지”라고 설명했다. ▷우크라이나가 미국제 장거리 미사일로 러시아와 북한군을 공격하면 푸틴은 보복에 나설 것이다. 여타 전쟁처럼 휴전을 앞두고 한 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국경선’ 공방은 뜨거워질 것이다. 이 와중에 북한군에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할 경우 전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도 예측하기 힘들어진다. 개전 1000일, 이번 전쟁은 러시아의 최초 구상과는 정반대로 누구도 이길 수 없는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연방 하원의원에 도전한 데이브 민 후보(48)가 13일 당선됐다. 이로써 수도 워싱턴의 연방 상·하원에서 일할 한국계 당선인은 4명으로 늘어났다. 한국계 최초 상원의원이 된 앤디 김(42)과 함께 하원의 영 김(62), 매릴린 순자 스트리클런드(62)가 그들이다. 아직 개표 중인 미셸 박 스틸(69)까지 당선되면 한국계는 5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93%가 개표된 가운데 스틸 후보는 50.03%를 얻어 200여 표 차 초박빙 우세를 지키고 있다. ▷5명이 당선된다면 하원의원 4명을 당선시켰던 2년 전 기록을 깨는 것이다. 한국계의 끊임없는 도전은 2년 전 하원 선거에 출마한 5명을 다룬 다큐멘터리 ‘초선(영어 표기는 Chosen)’에 잘 담겨 있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의사당 앞에서 “네게 모든 걸 선사한 미국을 사랑하고 가슴에 새기라”는 말씀을 들었던 소년은 3선 하원 의원을 거쳐 상원 의원으로 성장했다. 1992년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 방화 폭동을 아버지의 가게 한 구석에서 목격한 꼬마도 정치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변호사가 된 데이비드 김은 라틴계가 다수인 지역구에서 3번 연속 고배를 마셨다. ▷첫 한국계 연방의원은 김창준 전 하원의원(85)이었다. 그가 6년간 3선을 마치고 물러난 1999년 이후 20년 가까이 한국계는 없었다. 그럼 왜 늘어난 걸까. 한국계 미국인 등록 유권자는 110만 명을 기록하고, 미 의회에서 일하는 한국계 보좌관이 10년 사이에 20여 명에서 7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제 워싱턴 정치무대에서 존재감이 생겨난다는 해석이 많다. 또 한국의 국력 신장과 함께 이민자의 자녀들이 공직과 정치를 더 선택하는 경향도 생겼다. ▷미 의사당의 백인 중심주의에도 변화가 생겼다. 상원 100명, 하원 435명 의원 가운데 1980년 현재 백인은 95%를 차지했다. 백인 유권자가 80%이던 시절이다. 그랬던 것이 2022년 중간선거 이후 백인 의원이 75%로 줄었다. 백인 유권자는 59%로 축소됐다. 현재 한국계를 포함하는 아시아계 의원은 18명으로, 전체의 4% 수준이다. 트럼프 당선인이 이번 대선에서 불법 이민 이슈를 부각시키고, 백인끼리 뭉치자는 ‘정체성 투표’를 강조한 것도 세가 줄어드는 백인 정치가 배경이 됐다. ▷워싱턴 정치무대에서 한국계 중진은 아직 없다. 앤디 김이 6년, 영 김이 4년 의정 활동을 했으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는 쪽에 가깝다. 그럼에도 미국 대중은 한국계를 기득권이나 군림보다는 봉사의 존재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앤디 김 의원이 3년 전 폭도들의 미 의회 난입 때 깨진 유리조각과 쓰레기를 홀로 치우는 장면은 강렬한 기억을 남겼다. 낮은 자세로 임하는 정치인이 박수받는 것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다를 게 없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박성재 법무장관은 8일 국회 법사위에서 “우리 집에선 (집사람이) 제 것도 보고, 집사람 것도 제가 본다”며 “집사람이 제 휴대전화를 보면 죄짓는 거냐”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전날 기자회견에서 “(후보 시절) 아내가 아침 5, 6시인데 안 자고 엎드려서 제 휴대폰을 갖고 답하고 있었다. (잠을) 안 자고 완전히 낮과 밤이 바뀌어 그렇게 했다”고 한 말을 야당이 꼬집자 나온 답변이다. ▷박 장관은 “바쁜 경우에 간단한 답 같은 건 다른 사람을 시킬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도 했다. 박 장관의 발언은 논란의 핵심을 비켜간 것이다. 윤 대통령은 2022년 대선 후보 시절 입당원서에 적힌 전화번호가 노출된 뒤 문자가 쏟아졌다고 했다. 김 여사가 답변을 한 대상에 윤 대통령과 아는 사람들도 있는지, 번호가 저장돼 있지도 않은 생면부지의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부부간에 휴대폰 문자 등을 공유하는 이들이 많지도 않지만 설사 상대방 문자를 본다고 하더라도 당사자의 동의도 없이 대신 답변까지 하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 여사가 문자 상대방과 윤 대통령의 관계, 문자에서 언급된 이슈의 내용을 제대로 숙지하고 보냈는지 의문도 남는다. ▷윤 대통령은 새벽에 답장을 하던 김 여사에게 “제가 ‘미쳤냐, 잠을 안 자고 뭐 하는 거냐’ 그랬더니 (아내가) ‘이분들이 다 유권자인데…’”라고 했다는 말도 전했다. 김 여사가 밤잠 안 자고 정치권에 뛰어든 자신을 도왔다는 점을 설명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 답변은 자연스럽게 추가적인 궁금증을 낳았다. 김 여사가 이후 당선인 시절이나 대선에서 당선된 뒤에도 ‘바쁜’ 윤 대통령을 대신해 답변한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정치인이나 대선 후보 가운데 공개를 전제로 한 SNS 관리를 참모에게 맡기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하지만 휴대전화 문자 답신은 수신자로 하여금 ‘직접 썼다’고 믿음을 주는 것이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윤 대통령의 이 발언이 알려지자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문자 답변을 받은 이들 중에선 “내가 받았던 문자가 대통령이 보낸 게 맞나” 하는 반응들도 나왔다고 한다. ▷윤 대통령의 발언만으로는 김 여사가 단순 인사만 보냈는지, 다른 내용까지 보냈는지를 알 도리는 없다. 다만 통상의 대통령 부인 역할을 넘어서는 행동을 보여온 것과 맞물리며 논란을 자초한 측면이 강하다. 그런데 정작 윤 대통령은 같은 기자회견에서 자신은 김 여사의 휴대전화를 보지 않는다고 했다. 명태균 씨 논란과 관련한 답변을 준비하면서 “아내 휴대전화를 보자고 할 수도 없는 것이라, 제가 그냥 물어봤다”고 했다. 김 여사는 대통령 전화를 통해 문자 답신까지 하는데 대통령은 김 여사의 휴대폰을 보지 않는다니 “대체 뭔지” 하는 해석들이 나오고 있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선택한 첫 백악관 비서실장은 수지 와일스(67)였다. 선거 캠프의 좌장 역할을 했던 와일스는 “가장 덜 알려졌지만, 가장 막강한” 트럼프 사람으로 통한다. 와일스 중용은 대선 불복으로 비판받던 트럼프를 2021년 초 만난 것이 출발점이 됐다. 2016년, 2020년 대선 때 워싱턴이 아닌 플로리다주에서만 선거운동을 했지만, 와일스는 트럼프가 왜 졌는지, 뭐가 달라져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질문을 쏟아내던 트럼프는 “2024년 선거를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와일스는 미 역사상 첫 여성 비서실장이다.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때 비서실장이 생긴 이래 30명 넘게 거쳐갔지만, 여성은 없었다. 충성심과 냉철함이 그의 경쟁력이라는 게 미 언론의 평가다. 그의 별명은 얼음 아가씨(ice baby) 또는 얼음 여사(ice maiden). 할머니 같은 넉넉함 속에 비수같이 담긴 냉철함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막후 조정을 선호하는 와일스는 언론 인터뷰에 거의 응한 적이 없다. 당선을 확정 지은 순간에 트럼프가 와일스를 행사장 연단으로 이끌면서 “(당신은) 뒤에 있는 걸 좋아하는데, 뒤에 있을 사람은 아니야”라고 할 정도다. ▷비서실장 지명은 당선 이틀 만에 발표됐다. 8년 전 트럼프의 첫 당선 때는 6일 걸렸던 일이다. 정치 신인과 다름없던 2016년과 달리 트럼프가 4년 국정 경험을 바탕으로 일처리에 속도를 낼 것이란 신호로 읽힌다. 비서실장 인선 방향도 달라졌다. 트럼프는 첫 임기 4년 동안 국정 경험 부족을 메워줄 중앙정치 명망가, 해병대 4성 장군 출신, 예산 전문가 등을 기용했다. 하지만 와일스 발탁 소식을 보면 트럼프가 실무를 꼼꼼히 챙길 행정과 정무 감각을 더 선호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트럼프 1기 백악관은 한마디로 뒤죽박죽이었다. 트럼프는 회의 때 발언 시간을 독차지했고, 개인 휴대전화로 수없이 바깥 인사들과 통화했다. 또 누구와도 상의 없이 국방장관 해임을 트위터로 공표한 적도 있다. 그 시절 존 켈리 비서실장은 동료였던 안보보좌관에게 “내가 백악관을 얼마나 떠나고 싶어 하는 줄 아느냐”고 털어놓은 기록도 있다. 와일스의 첫 과제는 내년 1월 취임하는 트럼프의 돌출행동을 통제하고, 백악관을 질서정연한 곳으로 만드는 일이 될 듯하다. ▷미 언론은 와일스가 듣기 거북한 사안을 트럼프에게 직설적으로 보고하면서 캠프가 돌아가도록 했던 일처리 솜씨에 주목하고 있다. 45년 정치 경력 동안 고위직을 맡은 적이 없는 와일스가 ‘부통령보다 중요하다’는 비서실장직을 맡은 것도 이 점을 평가받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전 세계는 트럼프 2기가 가져올 변화를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와일스에게는 과거 어떤 백악관 비서실장 못지않게 관심이 모아질 것 같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북한은 러시아 파병을 통해 달러, 식량, 석유를 챙기고, 군사 정찰위성 기술, 낡은 구소련제를 대체할 전투기 확보까지 노릴 것이다. 그 심각성 때문에 윤석열 정부는 북-러의 군사기술 이전 수위를 낮추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어떤 무기를 어떻게 지원해야 할지 시나리오를 짜고 있다. 러시아 같은 군사대국의 엄포에 맞서는 위험천만한 두뇌 싸움이자 기 싸움은 시작됐다. 우리 현대사에서 이만한 군사적 위험을 떠안는 결정은 거의 없었다.러시아와 위험한 두뇌 싸움-기 싸움 결론부터 말하면, 정부는 대통령이 지난주 갑자기 꺼내 든 ‘살상용 무기’는 고사하고 방어용 무기도 지원 수준을 높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리 국민은 무기 제공에 동의하지 않는다. 지난주 무기 지원 반대 여론이 80%에 달했다. 한국이 2년 동안 미국을 통해 50만 발쯤 우회 지원했던 155mm 포탄이든, 우크라이나 영공으로 날아든 러시아의 미사일과 전투기만 공격하는 방어용 천궁-1, 2 미사일이든 여론 지지 확대는 쉽지 않아 보인다. 밑바닥을 드러낸 윤 대통령 리더십으로는 갈라진 정치와 취약한 여론 형성 구조상 상황 반전이 매우 어렵다. 윤 대통령은 취임 후 ‘글로벌 중추국가 외교’를 천명했다. 국가 위상에 걸맞게 북한 핵과 한반도를 넘어서는 외교를 하겠다는 구상인데, 이 멋진 구호에 담긴 어두운 현실은 살상무기의 직접 지원까지도 필요하면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윤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 등을 통해 외교의 큰 밑그림을 설명할 법했지만, 각인된 기억이 별로 없다는 점은 의외다. 외교장관도 국방장관도 여론 정지 작업에 게을렀다. 한국인은 제3국 전쟁에 왜 무기 제공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다. “6·25전쟁 때 16개 참전국 도움으로 나라를 구했다”라거나 “훗날 우리 안보가 위협받을 때 어쩌나” 하는 질문이 가능한데, 그건 사석에서나 오갈 뿐 공론장에 제대로 올려진 적이 없다. 어느 나라나 ‘먹고살기 힘든데 왜 지구 반대편 나라를 돕느냐’는 주장에 취약하다. 글로벌 경찰국가 전통이 강한 미국이지만 외려 대외 군사 개입 최소화를 앞세운 트럼프가 돌풍이다. 영국의 유럽연합 이탈(브렉시트)도 본질이 똑같다. ‘영국이 유럽의 일부일 때 런던 금융가의 고학력자만 좋을 뿐, 우리 같은 북쪽 공업지대 노동자에게 무슨 도움이냐’는 생각이 득세했다. 전 지구적 존재감에서 100년 앞선 나라들도 소수 엘리트를 제외하면 글로벌 통합과 책무에 둔감하다. 한국이라고 “강대국을 따라 하는 외교나 군사 협력이란 게 왜 필요한가. 대통령, 장관, 외교관, 대기업 임원, 교수 등 소수 엘리트가 해외에서 대접 잘 받는 거 말고 우리 삶이랑 무슨 상관이냐”는 주장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닭 피 맛보고 전쟁 결정하느냐”거나 “고문 기술 수출이냐”는 야당 대표의 발언은 수준 이하였지만, 이런 흐름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트럼프 현상-브렉시트… 모두 같은 이야기 정말 러시아에서 북한군의 전투 활동에 맞춰서 단계별로 무기 제공 범위를 정한다는 우리 전략이 북-러 협력을 줄일 수 있을까. 국가 자존심에서라도 무대응-불관여는 선택지가 아니라지만, 군사적 불가측성이 예상돼 이 질문을 안 던질 수가 없다. 러시아와 연관된 납치나 테러라도 생긴다면 대혼란이 예상된다. 윤석열 정부는 정치적으로 난처한 상황이다. 한기호-신원식 문자도 곡해할 만한 내용이었다. 괜한 오해를 살 강경 드라이브라면 처음부터 정리하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지금 구상 중인 시나리오에서 강도를 한두 단계 낮춰야 할 수 있다. 그 대신 글로벌 중추국가 외교가 주는 단맛(외교적 대우받기)과 쓴맛(불량 국가와의 갈등)을 공히 국민에게 설명하는 작업을 지금이라도 시작할 필요가 있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는 황당한 주장을 펼 때 뜬금없는 말로 논점을 흐리곤 한다. 며칠 전 미 유력 매체인 블룸버그 편집장과의 1 대 1 대담에서도 그랬다. 트럼프는 “당신의 감세 공약대로라면 국가부채가 10년 동안 최소 7조 달러(약 9000조 원)가 늘어난다는 보고서가 있다. 월스트리트저널도 그렇게 비판했다”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그 신문이 뭘 아나. 모든 게 다 틀리는 신문이다. 하긴, 당신도 평생을 틀려 왔으니…”라고 응수했다. “당신이 틀렸다(wrong)”는 말을 5번 반복하는 장면에선 논리적 설명을 할 뜻이 안 보였다. ▷그 자리에서 트럼프 후보는 한국을 “머니 머신(money machine·현금인출기)”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대통령 재임 때 한국 정부에 “주한미군 주둔비용을 더 대라. 국회에서 연 20억 달러(약 2조7000억 원)로 동의를 얻어 오라”고 요구했던 일을 공개했다. “그 다음 해엔 50억 달러를 받아낼 생각이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국의 분담액이 연 1조1000억 원에 못 미치던 때였다. 자신이 이렇게 애썼지만, 후임 바이든 대통령이 합의를 백지화시켰다는 비난을 빼놓지 않았다. ▷트럼프는 마치 우리 정부로부터 큰 걸 얻어냈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당시 한미 방위비 분담 특별협정 협상은 그가 퇴임할 때까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국방장관과 국무장관 등 참모들은 “한미동맹은 국방비 숫자를 뛰어넘어서는 전략적 가치가 있다”며 트럼프의 막무가내식 압박을 만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조언에는 별 관심이 없는 트럼프는 블룸버그 대담에서 “내가 지금도 대통령이었다면 한국은 매년 100억 달러를 내고 있을 것”이라고 호언했다. ▷대선 승리에 한 발 다가섰다는 트럼프의 예측 불가 기질은 중요한 문제다. 불쑥불쑥 이슈를 꺼내들면서 상대국을 압박하지만, 그때뿐인 경우도 있다고 한다. 워터게이트 사건 특종 기자인 밥 우드워드의 책 ‘분노(Fear)’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파기와 관련된 일화가 담겨 있다. 하루는 트럼프가 “미국이 손해 보는 FTA를 깨겠다”며 효력정지 문서를 만들도록 불호령을 내렸다고 한다. 파장을 걱정한 게리 콘 국가경제위원장이 백악관 집무실 책상에 놓은 그 문서를 치워 버렸는데, 트럼프는 문서의 존재를 끝내 잊어 버렸다고 한다. ▷트럼프는 이날 특유의 화법으로 대담을 주도했다. 늘 그래 왔듯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의 어휘를 짧은 단문으로 쏟아냈다. 단순한 메시지를 열 번이고 백번이고 반복하는데, 그의 말을 확신하는 지지층은 여전히 두텁다. 그의 엉터리 언행에도 우리는 사실상 속수무책이다. 미 대선이 다가올수록 선거 결과가 우리 선거 때만큼이나 신경이 쓰인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김건희 여사 공천개입설로 시작된 명태균 씨 파문이 2022년 대선을 앞두고 이뤄진 여론조사 문제로 확산되고 있다. 경남 창원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명 씨는 미래한국연구소라는 여론조사업체와 시사경남이라는 인터넷 매체를 만들었는데, 이를 통해 여론조사를 직접 하거나 외부에 맡겼다. 그런데 재정 기반이 취약한 명 씨가 대선 1년 전부터 몇몇 언론사와 함께 50차례 여론조사를 한 것으로 드러났고, 57만 명의 국민의힘 당원 명부를 입수해 미공표 여론조사를 실시하기도 한 것이다. ▷50차례의 조사는 모두 PNR(피플네트웍스 리서치)이란 ARS 조사업체가 맡았다. 눈에 띄는 건 50번 중 윤석열 후보가 1위인 것이 49번이었다. 딱 한 차례 2위를 차지했는데, 대선 2개월 전인 2022년 1월 초 조사였다. 김건희 여사의 대국민 사과 10일 뒤였다. 그러나 대선 1년 동안 규모가 큰 다른 업체의 조사에선 윤석열 이재명 후보가 엎치락뒤치락했다. ARS보다 응답률이 높은 전화면접을 하는 갤럽 조사가 대표적인데, 25회 조사 가운데 이 후보가 앞선 것이 15회였다. ▷그런데 명 씨와 함께 일했던 강혜경 씨가 유튜브에 출연해 폭로성 발언을 쏟아냈다. 강 씨는 “(대선이 임박했을 때) 3000∼5000개 샘플로 (여론)조사를 했다. 명 씨가 매일매일 윤 후보 쪽에 보고한다면서 빨리빨리 보고서 작성해 올리라고 지시했다”고 했다. 그는 여론조사에 들어간 예산이 3억7520만 원이란 서류를 공개하기도 했다. 김영선 전 의원의 창원의창 보궐선거 대가설도 거론했다. 강 씨의 주장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강 씨는 이달 21일 국감 출석을 예고한 상태인데, 그의 발언에 따라 정치권이 한바탕 요동을 칠 수도 있다. ▷국민의힘 당원 57만 명을 상대로 한 2차례의 여론조사도 논란이다. 이는 여심위 등록의무가 없는 미공표 조사였다. 2021년 10월 국민의힘 경선 후보가 윤석열 홍준표 유승민 원희룡 4인으로 압축된 때였다. 당 선관위가 4인 후보 캠프에 UBS메모리에 담아 준 정보가 명 씨 손에 들어갔던 것이다. 누가 명 씨에게 전달한 건지, 이 조사 결과를 당시 윤 후보 측이 건네받았는지, 비용 정산은 어떻게 한 것인지 규명돼야 할 사안이 한둘이 아니다. ▷여론조사 학자들은 “여론 자체만큼이나 여론조사가 선거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론조사라고 다 같은 게 아니다. 통상 ARS가 아니라 훈련받은 면접원이 질문할수록, 응답률이 높을수록 품질이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여기에 조사의뢰자나 조사 수행업체의 기본적 자질도 필수적이다. 명 씨가 실제로 불투명한 여론조사 결과를 앞세워 정치 브로커 역할을 했다면 수사로 가릴 일이다. 만약 사실이라면, 여론조사가 아니라 심각한 여론 조작이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1년 전 오늘 팔레스타인 무장 정치세력 하마스가 분계 장벽을 넘어 이스라엘 남부를 기습했다. 민간인 약 1200명이 숨졌고, 약 250명이 인질로 끌려갔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지상군을 투입해 하마스 소탕에 나섰고, 서울 면적의 60% 정도인 가자지구 대부분을 장악했다. 몇 차례의 이-하마스 휴전협상이 불발되는 동안 국제사회 관심은 헤즈볼라의 배후인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으로 옮겨간 듯하다. 1년 전 받았던 전쟁의 충격이 먼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다 가자지구 사망자가 4만1870명에 이른다는 통계가 전해졌다. 하마스 보건부와 유엔 기구가 파악한 이 숫자는 민간인과 하마스 대원을 합친 것인데, 사망자의 30% 이상이 어린이로 파악됐다. 정치와 군인이 시작한 전쟁에서 사회적 약자가 제일 먼저 희생된다는 사실이 재확인됐다. 하마스는 빽빽한 흙벽돌 건물 밑으로 지하 터널을 뚫었고, 그곳에서 무기와 인질을 숨겨놓고 저항해 왔다. 하마스가 자국민을 방패 삼은 곳에 이스라엘의 공격이 집중되면서 희생자는 빠르게 늘어났다. ▷인구 215만 명인 가자지구에서 주민의 90%가 피란민이 됐다. 식량, 의료품이 절대 부족하고, 병원과 학교는 제 기능을 잃었다. 구호품 실은 트럭을 차단하는 바람에 외국 공군 수송기가 약품과 밀가루를 낙하산에 매달아 투하하던 장면이 기억에 선명하다. 1년 동안 이 좁은 땅에 평균 3시간에 1번씩 폭격이 감행됐다. 외신 사진 가운데 팔다리에 자신과 가족의 이름을 써넣는 모습이 있다. 폭격으로 신체 일부가 훼손되더라도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마스 보건부가 지난달 649쪽 분량의 전쟁 사망자 명단을 공개했다. 그때까지 사망자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3만4000여 명을 나이순으로 정리한 기록이다. 그 명부 1∼14쪽을 채운 710명은 0세로, 첫 번째 생일을 맞이하지 못한 채 어른들의 전쟁에 스러져 갔다. 군사작전에 직접 희생됐을 수도 있고, 나빠진 영양과 의료 환경 탓에 숨졌을 수도 있다. 기습공격은 하마스가 감행했지만, 그 피해는 하마스가 지키겠다고 약속한 팔레스타인인에게 집중된 것이 이번 전쟁의 아이러니다. ▷지난 1년간 이스라엘은 군사작전에선 승리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과 아랍세계에는 분노와 증오가 쌓여 왔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대선 철 미국의 리더십 부재를 틈타 더 공세적인 행동에 나서고 있다. 가깝게는 하마스와 헤즈볼라, 멀리는 이란과 예멘 반군을 상대로 하니, 네 갈래 전쟁이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선 하마스 1인자 제거와 100명 남짓 남은 이스라엘 인질의 석방을 손에 쥐어야 멈출 듯하다. 하마스로선 응할 수 없는 조건이니, 전쟁은 당분간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러는 동안 정치와 거리가 먼 이들의 수난은 멈추지 않을 것 같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