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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5월 미국의 유명 흑인 뷰티 크리에이터는 유튜브 영상에서 한국의 쿠션 파운데이션을 바르면서 “내 피부톤에 딱 맞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이 유튜버가 한국 파운데이션 색상이 너무 밝아 아쉽다고 하자 한국 화장품 회사에서 어두운 톤을 개발해 선물한 것이다. 흑인 피부에 딱 맞는 파운데이션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순식간에 화제가 됐다. 한국 제품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아마존 뷰티 카테고리에서 판매량 1위에 올랐다. ▷K뷰티의 강렬한 향기가 미국 시장도 홀리고 있다. 한국 화장품은 미국에서 지난해 1∼10월 2조 원어치 팔렸는데, 수입 화장품 시장 점유율 22%로 사상 처음 1위에 올랐다. 그동안 북미 수입 뷰티 시장을 양분하던 프랑스와 캐나다를 상당한 격차로 제쳤다. 미국 소비자들로부터 가성비가 좋다는 호평을 받으며 판매량이 급성장했다. 실제 최근 아마존에서 팔리는 뷰티 제품의 상위 목록에는 한국 제품이 대거 포진해 있다. ▷K뷰티는 2010년대 대기업을 중심으로 중국 시장에서 1차 전성기를 맞았다. 최근의 K뷰티 2차 전성기는 미국, 일본은 물론이고 전 세계 다양한 국가에서 중소·인디 브랜드가 주도하는 게 특징이다. 수출 제품 10개 중 7개가 중소·인디 브랜드 제품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온라인 채널이 확대되면서 중소기업이 해외를 직접 공략하기에 유리한 조건이 조성됐다. 영화 드라마 음악 등 K컬처 덕분에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도 한몫했다. ▷자본력이 약한 인디 브랜드가 미국 등 세계 시장을 휘저을 수 있었던 데는 ‘한국의 TSMC’로 불리는 한국콜마와 코스맥스 등 제조자개발생산(ODM) 기업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자체 생산시설이 없어도 좋은 기획 아이디어만 있으면 ODM 업체를 통해 빠르게 제품을 내놓을 수 있었다. 반도체로 치면 인디 브랜드가 반도체 설계(팹리스), ODM 업체가 위탁생산(파운드리)을 맡은 셈이다. 이렇게 출시된 다양한 제품은 올리브영 등 플랫폼을 통해 팔려 나갔다. 기획, 생산, 유통의 한국식 ‘화장품 생태계’가 제대로 구축된 것이다. ▷고객의 취향과 수요에 즉각 대응하는 ‘빨리빨리’도 K뷰티만의 경쟁력이다. 한 국내 화장품 브랜드는 동양인 피부톤에 맞는 5가지 색상의 쿠션을 생산하다가 다양한 인종의 미국 시장을 노리고 색상을 30가지로 늘렸다. 한국 회사들은 에어쿠션, 마스크팩, 스틱 파운데이션, 뷰티 기기 등 새로운 제품도 끊임없이 선보였다. 다만 인디 브랜드가 급증하면서 단기 기획과 마케팅에만 치우치고 있다는 점은 걱정이다. 고품질 화장품을 위한 원천 기술 확보 등 꾸준한 연구개발도 함께 이뤄져야 장기 수출 효자품목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대규모 조직과 회사도 단 ‘한 명’ 때문에 순식간에 망가질 수 있다. 233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영국 베어링스 은행이 그랬다. 손실을 은폐하며 무모하게 거래하던 직원 ‘한 명’ 때문에 1995년 파산했다. ‘팻핑거’ 같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거짓을 거짓으로 덮다가 일을 키웠다. 하물며 그 ‘한 명’이 한 나라의 리더라면…. 주식회사 대한민국이 ‘1호 영업사원’을 자처하던 윤석열 대통령의 거듭된 오판과 욕심으로 휘청이고 있다. 비상계엄의 무모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뒤에도 안개는 좀처럼 걷히지 않는다. 경제사령탑이 대통령, 국무총리 직무에 더해 재난 총괄까지 맡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는데, 초인이 아닌 이상 경제는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드라마 ‘지정생존자’처럼 대행의 대행의 순서가 어디까지 밀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당분간은 정치에 뭔가를 기대하긴 어려워 보인다. 새해 첫날이지만 기대와 희망보다 불안과 좌절이 짓누른다.정치 실종에 자력구제 나선 기업들 새해 사업 계획을 준비하는 기업들은 ‘시계 제로’ 상태다. 보호주의가 득세하고 첨단산업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홀로 광야에 내던져진 꼴이다.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그 어느 때보다 경제 외교와 산업 정책이 중요한 시점에 무정부 상태가 돼 버렸다. “가장 필요할 때 우리를 대변할 정부가 없다. 우리는 인질로 잡혀 있다”고 외신에 호소한 한 대기업 관계자의 말은 처절하게 들린다. 경제가 어렵다는 말이 하루 이틀이 아니어서 식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지금이야말로 진짜 위기다. 천장을 뚫고 올라선 원-달러 환율은 1500원을 넘보고 있다. 지난해 주식시장은 남들이 20, 30%씩 오를 때 홀로 10% 가까이 뒷걸음질쳤다. 소비심리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최악이고, 기업경기는 부정적 전망이 역대 최장인 34개월 연속 이어지고 있다. 8년 전 탄핵 때는 반도체 슈퍼사이클이란 비빌 언덕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10대 주력산업 모두 하나같이 위태롭다. 정치 불안으로 국가신용등급이 하락한 프랑스가 남의 일이 아니다. 정부와 정치에 기댈 수 없는 기업들은 ‘경제 외교관’을 자임하며 한국 경제를 지키려 자력구제에 나서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제인협회, 한국무역협회 등 경제단체들은 세계 각국에서 서한을 보내 “한국 경제는 건재하며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맨 처음 만난 것도 한국 정부 인사가 아닌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었다. 그는 트럼프 당선인 앞에서 “한국은 저력 있는 나라이니 믿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다시 한 번 ‘기업가 정신’ 불 지필 때 불확실한 경영 환경에서 안정에 방점을 두면서도 미래 성장을 위한 준비도 단단히 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로봇 전문기업을 자회사로 편입하고 미래로봇추진단을 신설하며 로봇 경쟁에 참전을 선언했다. 현대차그룹은 처음으로 외국인 최고경영자(CEO)를 선임하는 등 트럼프 2기 대응을 위한 진용을 새로 꾸렸다. 4대 그룹은 지난해 불확실한 경영 환경 속에서도 영업이익을 웃도는 규모로 인공지능(AI)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등에 선제적으로 투자했다. 비주력사업을 매각해 자금을 확보하고, 미래성장동력을 중심으로 사업을 재편하고 있다. 조선, 에너지, 원전, 방산 등의 산업에서 새로운 기회를 엿보고 있다. 과거 외환위기, 금융위기, 코로나19 등 미증유의 국난을 이겨 온 데는 수출을 앞세워 세계 시장을 열어 온 기업들의 역할이 컸다. 절망과 폐허에서 희망의 싹을 틔울 수 있었던 건 도전과 혁신의 기업가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단체장들이 올해 신년사에서 하나같이 기업가 정신을 재점화하겠다고 각오를 다진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아직은 깜깜해 보이지만 기업이 앞장서 끌고 국민이 함께 밀면 지금의 위기도 보란 듯이 극복할 수 있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은 비상계엄 포고령 초안을 자신이 작성했다고 26일 변호인단을 통해 주장했다. 그러면서 당초 포고령 초안엔 국민 통행금지 조항이 있었는데 윤석열 대통령이 이를 삭제했다고 했다. 국민 생활의 불편과 경제 활동 등을 고려했다는 것이다. ‘국회에 경종을 울린다’는 목적의 ‘경고성 계엄’임을 강조해 윤 대통령을 비호하려는 의도겠지만, 위헌·위법적인 포고령을 대통령이 직접 검토, 수정했다는 사실만 확인됐을 뿐이다. ▷비상계엄 선포 당시 뉴스 화면 아래 ‘오후 11시 이후 통행 시 불심검문·체포’라는 자막을 합성한 사진이 온라인에서 확산했다. 계엄을 경험한 장년층들은 웃어넘길 수 없었다. 야간 통금 강화는 시위 금지, 대학 휴교 등과 함께 과거 계엄 포고령의 단골 조항이었기 때문이다. 예전 문건을 베껴 쓴 티가 나는 이번 포고령에도 통금이 포함될 가능성은 높아 보였다. 윤 대통령이 통금 조항을 뺐다면 국민을 배려한 게 아니라 국민의 분노를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 말에 폐지됐다가 일제강점기에 부활한 야간 통행 금지는 광복 이후엔 1945년 9월 미 군정 포고령 1호로 시작돼 6·25전쟁과 군사정권 등을 거치면서 계속됐다. 적용 시간과 지역에 변화는 있었지만 대체로 자정에서 오전 4시였다. 오후 10시가 되면 라디오에선 귀가 종용 방송이 나왔고, 자정이면 사이렌 소리와 방범대원들의 호각소리가 거리에 요란했다. 야간 통금은 1982년 1월 5일 36년 4개월 만에야 해제됐는데, 서울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국가 이미지를 의식한 조치였다. ▷통금 시간이 다가오면 막차 버스를 타기 위해 마음이 급해졌다. 택시를 잡는 사람들은 ‘따블’과 ‘따따블’도 불사했다. 통금에 걸리면 파출소로 끌려가는 곤욕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즉결심판을 받고 벌금을 낸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집에 가지 못해 숙직실에서 잠을 청한 직장인, 단속을 피해 손을 잡고 달린 연인, 술집 문을 걸어 잠그고 밤새 술잔을 기울인 술꾼 등 장년층 이상에겐 그 시절 추억 하나쯤은 있으리라. 크리스마스 이브 등에 잠깐 통금이 해제되면 거리마다 젊은이들이 쏟아져 나와 밤을 즐기기도 했다. ▷야간 통금 해제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컸다. 온전히 ‘24시간 시대’가 열리면서 편의점 등 24시간 문을 여는 가게도 생겼다. 서비스 부문의 고용이 늘어나고 소비심리가 살아나는 등 경제효과도 적잖았다. 무엇보다 국민들이 온전한 이동의 자유를 되찾은 것이 가장 큰 효과였다. 40여 년 만에 국민의 밤 시간과 자유를 다시 빼앗겠다는 발상을 했던 계엄 세력은 얼마나 후진적인가. 해외의 시선을 의식해 통금을 해제한 군사정권보다도 퇴행적으로 보인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테러범이 장악한 버스 앞을 무장차량이 가로막았다. 대원들은 해머로 유리창을 깨고 경사로를 만든 뒤 순식간에 버스 안으로 뛰어들어 테러범을 체포했다. 불과 30초. 대원들의 눈엔 망설임이 없었다. 6월 공개된 대테러 작전 훈련에서 육군특수전사령부 707특수임무단은 ‘특전사 중의 특전사’로 불릴 만큼 믿음직했다. 하지만 3일 밤 TV 속에선 정반대였다. 뭘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9일 김현태 707특임단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전투에서 이런 무능한 명령을 내렸다면 전원 사망했을 것”이라면서 “부대원들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에게 이용당한 피해자”라며 울먹였다. 김 단장은 비상계엄 선포 직후인 3일 오후 10시 30분경 특전사령관으로부터 국회 본청과 국회의원 회관을 봉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국회 구조를 몰라 ‘건물 출입문만 잠그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내비게이션 앱인 티맵으로 국회 본청 건물과 헬기가 착륙할 운동장 위치를 확인한 게 작전 준비의 전부였다. ▷오후 11시 50분경 헬기에서 내려다보니 상황은 전혀 달랐다. 국회의사당은 너무 커서 소수 인원으론 통제가 불가능했다. 후문으로 갔더니 자동 유리문이어서 잠금이 어려웠다. 정문으로 가니 이미 기자들과 국회 관계자들이 몰려 있었다. 그제야 창문을 깨고 들어가 안쪽에서 문을 잠그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아무런 준비도 계획도 없던, 무엇을 위해 하는지조차 모르는 작전. 부대원들은 “우리가 여기서 지금 뭐하는 짓이지”라고 웅성거렸다. ▷무능하고 사악한 지휘관은 적보다 무섭다. 건국 이후 평시 작전 중 가장 많은 군인이 희생된 것은 1982년 2월 제주도에서였다. 707특임대대 47명, 그리고 공군 장병 6명을 태운 C-123 수송기가 한라산 계곡에 추락해 전원 사망했다. 현장에선 기상 악화로 이륙하기 어렵다고 보고했지만 위에선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지시만 반복했다. 군은 ‘대침투작전 중 순직’이라고 발표했지만 사실은 달랐다. 제주공항 활주로 준공식을 위해 제주도를 찾을 예정이던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경호가 목적이었다. ▷윤석열 대통령과 김 전 장관은 707특임단이 국회를 봉쇄해 계엄 해제 요구안의 가결을 막고, 방첩사령부와 특수정보부대(HID)가 주요 인사를 체포·구금하는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간단한 작전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의 작전은 게임이 아니었다. ‘제복 입은 시민’인 장병들은 그들의 장기말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무능한 지휘관들의 작전은 실패했지만 최정예부대의 명예와 자존심은 짓밟혔다. 졸지에 계엄군이 됐던 장병들의 상처는 누가 치유해줄 수 있을까.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백악관과 상하원을 모두 장악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행보는 거침없었다. 취임 첫날부터 강하게 밀어붙이려는 듯 역대 정부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로 ‘충성파’ 인사들을 주요 요직에 지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법무장관으로 지명했던 맷 게이츠 전 연방 하원의원이 자진 사퇴하면서 처음으로 제동이 걸렸다. 견제는 진영 내부에서 나왔다.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트럼프는 왕이 아니다”라고 논평했다. ▷게이츠 전 의원은 법무장관 지명 전부터 미성년자 성매수 등 각종 의혹에 휩싸였지만 트럼프 당선인의 신뢰는 굳건했다. 하지만 각료 인준 권한을 가진 상원에서 부정적 분위기가 퍼졌다. 트럼프 당선인이 상원의원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지지를 당부했지만 인준에 필요한 표를 확보하지 못했고, 결국 게이츠 전 의원에게 자진사퇴를 종용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위세 등등한 당선인 신분임에도 상원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미국에선 대통령이 장차관, 연방판사, 대사, 군 장성 등 1200여 고위 공직자를 임명할 땐 상원에서 과반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공화당은 상원 100석 가운데 53석을 확보했지만, 단 4표만 이탈해도 과반이 깨진다. 뉴욕타임스는 최소 4명의 의원이 게이츠 전 의원의 인선에 반대했다고 전했다. 여성인 리사 머카우스키, 수전 콜린스 의원은 트럼프 1기 때 대통령 탄핵소추에도 찬성표를 던졌다. 공화당의 전통 노선을 상징하는 미치 매코널 상원 원내대표와 기후위기 회의론과 싸워 온 존 커티스 당선인도 부정적이었다. ‘보편관세’에 공개적으로 반대해 온 존 슌 의원이 차기 상원 원내대표로 당선된 것도 의미심장하다. 외교, 무역 등 사안에 따라 상원이 트럼프 2기 행정부를 막아설 가능성이 있다. ▷공화당이 상원 다수당이던 트럼프 1기 때도 상원은 수차례 대통령의 독주를 제지했다. 임기 초인 2017년 ‘오바마 케어 폐지’ 법안이 공화당 의원 6명의 반대로 무산됐다. 2019년 3월엔 예멘 내전에서 미군의 개입을 중단하는 결의안과 국경 장벽 건설을 위한 비상사태 선포를 무력화하는 내용의 결의안이 연이어 상원에서 가결됐다. 공화당 상원의원들의 ‘반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미국 상원(Senate)의 명칭은 고대 로마 공화정에서 집정관을 견제한 원로원(元老院·Senatus)에서 따왔다. 임기가 6년으로 긴 상원의원들은 소속 정당의 방침이나 여론의 눈치를 덜 보고 ‘국가 지도자(statesman)’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노련한 참모들인 ‘어른들의 축’이 과도한 트럼피즘을 견제했던 트럼프 1기와 달리 젊은 충성파들로만 채워진 트럼프 2기에서, 상원이 미국 민주주의를 지킬 어른의 역할을 해낼지 주목된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최근 공직 사회는 상시 구인난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용산’과 가까운 곳일수록 더욱 그렇다. 에이스 공무원들의 승진 코스였던 대통령실이나 국회 파견은 손을 드는 사람이 없다. 되레 몸이 아프다는 등 갖은 핑계를 대며 손사래를 친다. 자칫 ‘순장조’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이른바 ‘대왕고래 프로젝트’(동해 심해 가스전 개발 사업)를 추진할 산업통상자원부 태스크포스(TF)도 지원자가 없어 애를 먹고 있다. 시추해도 성과가 없을 경우 정권이 바뀌면 곤경에 처할 수 있어서다. ▷정부·여당 지지율이 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공직 사회에서는 복지부동, 보신주의가 팽배해 있다. 이제 겨우 임기 반환점을 돌았건만 분위기는 벌써 임기 말이다. 4대 개혁 등 정부의 핵심 정책에 전혀 힘이 실리지 않는다. 용산에서 업무 지시가 내려오면 공무원들은 절차상 문제가 없는지부터 따진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정책 담당자들이 감사, 수사로 탈탈 털리는 것을 본 학습효과다. 책임 면피를 위한 대비는 일상화됐다. 윗사람 지시를 녹음하고, 보고서는 누구 지시로 수정했는지 표시해 둔다. ▷‘어차피 뭘 해도 안 된다’는 자괴감도 크다. 공무원은 법률로 일하는데, 아무리 정책을 열심히 만들어도 여소야대 국회에서 통과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대통령실과 여당은 정책을 내놓으라고만 할 뿐 정치적 실타래를 풀어 정책의 추진동력을 높일 노력은 제대로 하지 않는다. 야당은 정부의 발목을 잡고, 정부는 거부권으로 응수하는 멱살잡기 식 국정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니 일을 안 해도 티가 나지 않는다. ▷정책을 내놓을 때마다 엇박자, 부실 논란에 휩싸인 것도 공직사회의 힘을 빼고 있다. 연구개발(R&D) 투자 축소 논란 등에서 보듯 대통령이 불쑥 언급하면서 설익은 정책을 내놨다가 여론이 안 좋으면 180도 뒤집는 일이 반복됐다. ‘가계부채 관리’와 ‘서민 지원 확대’의 두 마리 토끼를 잡으라는 모순된 지시 속에 주택 대출 정책은 오락가락했다. 정부의 정책 철학과 방향성이 모호하니 부처 간 긴밀한 업무 협조는 사라지고 각자도생의 이기주의가 확산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은 구조개혁이 지지부진하다며 연말까지 성과를 내라고 닦달하고 있다. 갑자기 임기 후반부의 우선 국정목표로 ‘양극화 해소’를 제시한 뒤 정책을 가져오라고 다그친다. 하지만 몰아붙이기만 한다고 해서 좋은 정책이 나오고 느슨한 공직 기강이 잡히는 건 아니다. 적당히 하는 시늉만 하다가 일이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대통령부터 확실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 국민 신뢰를 회복하고 정치를 복원하지 못한다면 바짝 엎드린 공무원들을 일으켜 세우긴 쉽지 않을 것같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새 정부가 들어서면 정부와 공공부문 인사와 관련해 어김없이 신조어가 등장한다. 연예인 이름을 활용한 작명이 많았다. 이명박 정부에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이 있었다면, 박근혜 정부 땐 ‘성시경’(성균관대·고시·경기고)이 나왔다. 문재인 정부에선 ‘캠코더’(캠프·코드·더불어민주당)로 변주되더니, 윤석열 정부에선 다시 ‘박보검’(이명박계·보수·검찰)이 소환됐다. 매 정부마다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늘 반복되는 낙하산 인사, 코드 인사의 별칭이다.2008년 서울대에 교환 학생으로 와 있던 24세의 독일 대학생 다비드 쇤헤어에겐 이런 현상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명박(MB) 정부 출범 직후여서 ‘고소영’ ‘S라인’(서울시 라인) 같은 신조어가 오르내렸는데, 인사의 키워드가 이렇게 회자되는 것을 독일에선 보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독일에선 한국의 대통령처럼 특정인이 폭넓게 인사권을 행사하지도 않았기에 인사가 큰 이슈가 되지도 않았다고 했다.이후 영국에서 재무금융학 박사 과정을 밟던 쇤헤어는 논문 주제를 고민하다가 한국에서 접했던 기묘한 키워드를 다시 떠올렸다. 한국의 ‘낙하산 인사(parachute appointments)’에 대해 실증적으로 분석해 보기로 했다. 이 논문이 주목받으면서 그는 2016년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됐다. 지난해 9월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로 다시 한국에 들어온 그를 13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본사에서 만났다.》● “공기업 낙하산, 연간 GDP 0.41% 손실” 쇤헤어 교수의 박사 논문 제목은 ‘정치적 인맥과 배분 왜곡’이다. 그는 “MB 정부의 낙하산 인사들이 연줄로 얽힌 기업들의 업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체계적으로 연구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고려대와 현대건설을 키워드로 공기업 인사의 영향을 추적했다. MB 취임 이후 42개 대표 공기업에서 고려대 또는 현대건설 출신 사장이 3명에서 12명으로 급증했다. 낙하산 인사의 영향은 정치적 연줄과 학맥을 기반으로 공기업 하위직으로, 민간기업으로 낙수효과처럼 번졌다. 쇤헤어 교수는 “‘MB 네트워크’에 힘입어 공기업을 장악한 사장과 임원들이 같은 네트워크에 있는 민간기업에 조달 계약을 더 많이 할당하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했다. 이 같은 현상은 민간 은행에서도 확인됐다. ‘민간 부문으로 확장된 정치적 보은과 정실인사’라는 논문에서 쇤헤어 교수는 은행을 장악한 MB 인맥이 같은 네트워크에 있는 기업들의 여신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분석했다. 그는 “MB 당선 이후 민간 은행들도 고려대 출신의 최고경영자(CEO)와 임원을 대거 선임했고, 고려대 출신 임원들이 있는 기업에 더 많은 대출을 해주기 시작했다”고 했다. 쇤헤어 교수의 관심은 낙하산 인사 자체는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이 일상 경험을 통해 인지하고 있는 낙하산 인사의 폐해가 얼마나 강력하고 널리 퍼져 있는지, 어떤 사회적 비효율을 가져오는지 확인하는 게 연구의 목적”이라고 했다. 쇤헤어 교수는 “MB 네트워크의 공기업이 같은 네트워크의 기업에 할당한 계약의 결과를 분석해 보니 비용 증가, 공사 부실, 공기 지연 같은 부작용이 더 많이 발생했음을 확인했다”며 “이에 따른 국가적 손실은 연간 국내총생산(GDP)의 0.41%에 이르는 것으로 분석됐다”고 했다. MB 네트워크와 같은 연줄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고 가정하면 경제적 손실은 연간 GDP의 1.08%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분석 기간인 2008∼2011년 전체를 따지면 60조 원에 이르는 엄청난 손실이다. 은행에서도 같은 네트워크의 임원이 있는 회사에 대출을 해준 경우 일반적인 대출 회수율보다 2.84%포인트 낮았다. 낙하산 인사가 은행에 손실을 끼치고 금융 부실을 키운 것이다. 쇤헤어 교수는 “연구의 목적은 특정 정부나 인물, 네트워크를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었다”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실 상당히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도 정부가 바뀔 때마다 공공기관 주요 요직에 자기 사람을 꽂아 넣었고, 민간에서도 정치적 연줄을 기대한 코드 맞추기 인사가 이어졌다. 그는 “이 같은 정치적, 사회적 인맥은 비즈니스 거래를 왜곡해 경제적 자원 배분에서 거대한 왜곡을 발생시키고, 결과적으로 경제 성장과 사회 복지를 저해할 수 있다”며 “전문성 없는 정치적 인사가 횡행하면 사회 전체적으로도 능력과 실적에 기반한 인센티브 체계가 붕괴될 것”이라고 했다. 낙하산 인사의 문제를 해소할 해법은 뭘까. 쇤헤어 교수는 “낙하산 인사는 지지에 대한 보상과 향후 정치 과정에서의 동맹을 확보하기 위해 발생한다”며 “한국처럼 임명권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 시스템에서는 문제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정부가 특정 인사들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줄이고, 전문성과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을 만들어 독립적 기구를 통해 공기업 사장을 임명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독일의 경우 독립 기구를 통해 공공기관장을 임명하고 정부에선 인사에 개입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제도 효율성 높이면 한국 잠재력 충분” 쇤헤어 교수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에서 공부하다가 2008년 교환학생으로 6개월간 서울대에서 공부했다. “일본 교토대와 서울대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한국행을 결정했는데 돌이켜보면 인생을 바꾼 선택이었다”고 했다. 학자로서의 출발점이 된 박사 논문의 아이디어를 얻은 것도 행운이었지만, 평생의 반려도 한국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독일어-한국어 언어 교환을 위해 만난 서울대 법대 여학생과 장거리 연애 끝에 2016년 결혼했다. 지난해 한국으로 오기로 결심한 것도 복직하는 아내와 한국에서 함께 있기 위해서였다. 쇤헤어 교수는 “한국에서 1년 넘게 살아보니 독일과 비슷하게 불필요한 관료주의와 행정적 비효율성이 생산성을 저해하는 부분이 많다는 걸 느꼈다”고 했다. 프린스턴대에선 온라인에서 차량 등록번호만 입력하면 교직원 주차등록이 끝났는데, 한국에선 차량 리스 계약서, 가족관계 증명서 등을 요구해 등록에 한 달이 걸렸다고 했다. 질보다는 양을 강조하는 분위기도 눈에 띄었다. 그는 “교수의 정년 심사 기준에서 논문이 출간된 학술지의 수준과 관계없이 논문 편수만으로 심사가 진행되는데 올림픽 금메달과 동네 운동회 우승을 동일하게 취급한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제도는 비효율적인 것 같은데 일은 어떻게든 굴러간다는 것이었다. 그는 “미국 같으면 사실 이렇게 제도가 복잡하면 아무도 해결하지 못했을 텐데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개개인의 효율성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이런 면에선 한국의 잠재력이 상당히 높다고 평가했다. “제도적 비효율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퍼포먼스를 낼 수 있으니 제도만 개선된다면 한국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모국인 독일 경제가 흔들리고 있는 데 대해 쇤헤어 교수는 “예견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용기가 부족했던 것 같다”고 진단했다. 강력한 제조업 기반에 안주하면서 4차 산업혁명으로의 이행에 뒤처졌고, 중국과의 경쟁 심화, 에너지 비용 상승 등의 영향으로 고통스럽게 탈산업화 과정을 겪게 됐다고 했다. 그는 “독일의 과도한 관료주의가 변화와 적응을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만들고 있으며 독일이 겪고 있는 구조적 문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더 어렵게 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도 독일의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쇤헤어 교수는 “제조업이 강한 한국도 산업구조 고도화를 위한 전환을 잘 준비해야 할 것”이라며 “한국이 경제적으로 다음 단계로 도약하려면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규제 개혁을 통해 투자를 저해하는 비효율적 시스템을 해소해야 한다”고 했다. 쇤헤어 교수는 한국에 대한 애정을 갖고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한국의 기업회생 제도에 대해 연구했고, 신용회복 프로그램이 채무자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들여다보고 있다. 정치적 네트워크와 정실주의에 대해서도 더 연구해 볼 생각이다. 그는 “한국 관련 데이터를 활용해 한국에서 흥미가 있을 만한 주제들을 연구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면서 “아직은 한국에 대해 잘 안다고 할 순 없지만 2, 3년 뒤엔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더 깊이 있는 답변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웃었다.다비드 쇤헤어 교수△198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출생△200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 졸업△2016년 영국 런던비즈니스스쿨 재무금융학 박사△2016∼2023년 미국 프린스턴대 경제학과 조교수△2023년∼서울대 경영대학 부교수△연구논문 ‘엘리트 집단의 지대추구’(2018년), ‘정치적 인맥과 배분 왜곡’(2019년), ‘인맥의 부상: 민간 부문으로 확장된 정치적 보은과 정실인사’(2022년)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한국에는 세계 시장 점유율 70%를 자랑하는 절대 강자 품목이 있다. 메모리 반도체부터 떠올리겠지만 수출 효자로 주목받고 있는 김 역시 그렇다. 동아시아를 제외하곤 ‘검은 종이(black paper)’ 취급을 받던 김은 최근 들어선 ‘슈퍼푸드’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해 김 수출액은 처음으로 연간 1조 원을 넘어섰고, 올해는 벌써 9월에 수출 1조 원을 달성했다. 급증하는 수요에 맞춰 공급을 늘리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 중이다. ▷국내 물김의 연간 생산량은 50만∼60만 t 수준에 머물러 있는데 생산량을 늘리기가 만만치 않다. 근해엔 김 양식장을 추가로 설치할 해역이 마땅치 않다. 기후변화로 해수면 온도가 상승하면서 수확량이 감소하는 것도 걱정이다. 이미 일본은 김 생산량이 반토막 났는데 남의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수온이 낮은 먼바다에서 김 양식이 가능한지 연구 중이다. 아예 밭에서 채소를 키우듯 뭍에서 김을 양식하는 육상 양식도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김 육상 양식은 바다와 비슷한 환경의 양식장을 육지에 만들어 원초를 키우는 방식이다. 해상에서는 수온이 5∼15도인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만 수확할 수 있지만 육지에선 사계절 가능하다. 기후변화 걱정도 없고 김에 생기는 기생병 질병인 갯병도 예방할 수 있다. 국립수산과학원과 풀무원은 충북 오송에서 김 육상 양식을 위한 실증 실험을 하고 있다. ‘바이오리액터’라고 부르는 부피 9㎥의 수조 3개에서 매달 10kg의 김을 생산하고 있다. 이 밖에도 광물 성분이 풍부하고 수온이 안정적인 제주도 용암해수를 활용하는 등 땅에서 김을 키우기 위한 다양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육상 양식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는 것은 김뿐이 아니다. 수산물 수입액 1위인 연어를 실내 양식장에서 키우려는 연구도 한창이다. 부산시수산자원연구소는 최근 대서양 연어 양식에 성공했고, 앞으로 연간 약 500t의 연어를 생산할 계획이다. 충남 당진에선 벼를 키우던 간척지에 연어 양식장을 조성해 양식을 시작했다. 10마리 중 9마리를 수입에 의존하는 새우도 요즘엔 수조에서 키우고 있다. 미생물로 수질을 정화하는 ‘바이오플록’ 기술을 활용한다. ▷해산물을 육상, 특히 실내에서 양식하려면 각종 첨단 기술이 필요하다. 수온과 염도를 실시간 확인하고 스마트폰으로 원격조종하는 스마트 양식 시스템을 구축한다. 수질 센서, 영상분석 장비, 자동 먹이 공급 장치 등 첨단 장비들과 유기적으로 연동된다. 노동집약적 산업인 어업을 첨단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는 것이다. 바다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 ‘씨팜(Sea Farm)’의 꿈이 바다는 물론 육지에서도 영글고 있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이 22일 “좌고우면하지 않고 돌을 던져도 맞고 가겠다”고 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의 ‘빈손’ 회동 다음 날 나온 발언이어서 김건희 여사 관련 논란에 대해 지금처럼 그대로 가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하지만 대통령실은 흔들림 없이 개혁 과제를 추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했다. 대통령실 설명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지금껏 정부가 구조개혁을 추진해 온 과정을 보면 “돌 맞아도 간다”는 의지가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윤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줄곧 연금, 의료, 교육, 노동의 4대 개혁을 강조해 왔다. 발언 빈도만 보면 4대 개혁 전도사라 부를 만하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저항이 있더라도” “선거에서 지더라도” 개혁을 완수하겠다는 발언은 자못 비장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임기 반환점을 앞둔 지금까지 손에 잡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구체적인 실행 전략 없이 구조개혁의 당위성만 설파하는 데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양보-뚝심-소통 없는 말뿐인 구조개혁 “돌 맞아도 간다”는 건 손해를 감수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 정부의 개혁에선 정치적 희생과 양보가 보이지 않는다. 선거에 지더라도 재정 건전성을 지키겠다고 했지만 올해 4월 총선을 앞두고 다급해지자 20여 차례 민생토론회를 통해 수십 조원의 선심성 약속을 쏟아냈다.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이 ‘주 69시간’ 프레임에 걸려 여론이 안 좋아지자 황급히 거둬들였다. 취임 초엔 시급한 구조개혁을 위해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전시 연합 내각 모델까지 거론하더니 야당과의 타협과 협치에는 아예 손을 놓아버렸다. “돌 맞아도 간다”는 건 뚝심 있게 추진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 정부는 각종 정책에서 오락가락 행보를 보였다. 부동산·가계대출 정책이 대표적이다. 대출은 조였다 풀었다 반복했고, 이자는 시장 상황과 반대로 올려라 내려라 했다. 고금리의 유리한 환경 속에서 집값과 가계부채를 잡기는커녕 들쑤셔 놓기만 했다. ‘샤워실의 바보’ 같은 정책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정부가 장기 개혁 과제를 흔들림 없이 추진할 것이라고 국민들이 믿기는 어렵다. 물론 흔들림 없이 추진하는 개혁도 있다. 의료개혁이다. 하지만 뚝심이라기보다는 아집에 가까웠다. 의료개혁은 공감대가 컸고 여론도 우호적이었지만 ‘의대 증원 2000명’을 고집스럽게 밀어붙이느라 고립을 자초했다. 처음엔 반대가 크더라도 소통과 설득을 통해 접점을 넓혀가는 게 개혁의 과정인데 정반대로 진행됐다. 비판과 저항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개혁을 하고 있다. 밀리면 안 된다”고 착각하는 듯하다. 돌을 맞는 것은 개혁의 과정이지 목표가 아니다.IMF “개혁 성공의 요체는 정치 신뢰” 국제통화기금(IMF)은 22일 내놓은 ‘세계경제전망’ 보고서에서 1996∼2023년 76개국의 상품·노동시장 개혁 사례를 분석해 개혁 성공의 조건을 추렸다. 결론은 정부와 제도에 대한 신뢰, 소통, 그리고 참여가 핵심이었다. 변화의 필요성과 정책 효과에 대해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정책 설계 초기부터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참여를 보장하며, 구조개혁의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한 대책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29일 국무회의에서 “구조개혁 없이는 민생도 없고 국가의 미래도 없다”며 연내에 4대 개혁 과제의 성과를 창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회의만 말고 대통령령으로 바꿀 수 있는 것들부터 빠르게 바꾸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구조개혁은 자판기에서 물건 뽑듯 뚝딱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구조개혁의 추진 동력을 높이려면 우선 정치적 신뢰부터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부터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차선을 넘나들며 아찔한 곡예 운전을 하는 차량을 본다면 음주운전 말고 이것도 의심해봐야 한다. 한국이 더 이상 ‘마약 청정국’이 아닌 현실에서 운전자가 약물에 취해 있을 수 있다는 건 억측이 아니라 합리적 추측이다. 지난달 28일 새벽 서울 강남구의 유흥가 주변 도로에서 경찰이 국내 최초로 ‘약물 운전 단속’을 시행했다. 검사키트에 침을 뱉으면 마약 및 약물 11종에 대한 양성 여부를 10분 안에 알 수 있다고 한다. ▷약물 운전에 대한 경각심이 커진 것은 지난해 8월 이른바 ‘롤스로이스남 사건’의 충격 때문이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역에서 약물에 취한 20대 남성 신모 씨가 롤스로이스 차량을 몰고 인도로 돌진해 20대 여성을 치어 숨지게 했다. 올해 4월엔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선 필로폰을 투약한 20대 벤츠 운전자가 오토바이를 추돌해 50대 배달노동자가 숨졌다. 마약류 및 약물 운전에 따른 운전면허 취소자는 2019년엔 57명에서 지난해 113명으로 크게 늘었다. ▷약물 운전은 환각, 환청 때문에 대형 사고를 유발할 가능성이 높지만 음주 운전에 비해 처벌 수위가 훨씬 낮다. 도로교통법에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의 운전 금지’ 조항이 별도로 있다. 혈중 알코올 농도에 따라 차등 처벌하는데, 0.2% 이상이면 2년 이상 6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상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상습 음주운전자에 대한 가중 처벌도 가능하다. 반면 약물 운전은 ‘과로한 때 등의 운전 금지’ 조항에 포함돼 규정돼 있을 뿐이며, 처벌 수위도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그친다. ▷경찰의 음주 측정 요구에 불응하면 형사처벌을 받는다. 하지만 약물 운전에 대해서는 동공 변화, 흥분, 말더듬 등의 징후가 명확해도 운전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경찰이 검사를 할 수 없다. 7월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교통사고를 낸 운전자에 대해 경찰이 마약 검사를 요구했지만 불응해 그냥 귀가 조치했다. 이 운전자는 2시간 뒤 또 사고를 냈고 이번엔 검사를 해보니 향정신성 약물 성분이 검출됐다. 검사를 강제할 수 있었다면 적어도 두 번째 사고는 막을 수 있었다. ▷음주운전에는 혈중 알코올 농도라는 기준이 있지만, 약물이 운전자의 상태에 미친 영향을 측정하는 기준이 없다. 합법적인 의료용 약물이라도 투약 후 얼마 동안 운전하면 안 되는지 가이드라인이 없다. 영국과 독일은 약물 투약 후 24시간 동안 운전하지 못하게 하고, 프랑스는 투약 당일에 운전을 금지한다. 날로 늘어나는 약물 운전이 ‘도로 위 시한폭탄’이 되지 않도록 제대로 된 기준을 세워 엄하게 단속하고 처벌할 수 있어야 한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한국은행과 재정·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기획재정부의 관계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다. 과거 한은은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의식해 정부와의 교류를 꺼려왔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좀 다르다. 지난달 30일 역대 총재 중 처음으로 기재부를 방문해 ‘정책 공조’를 강조했다. 교육, 복지 등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최근엔 대학 입시 문제를 거론해 논쟁의 불을 지폈다. 기재부와의 미팅 직후 “성적순 대학 진학이 공정한 것은 아니다”라며 8월 말 한은이 보고서에서 제안한 ‘상위권 대학 지역 비례 선발제’를 다시 거론했다. 올해 들어 한은은 ‘BOK 이슈노트’라는 형식을 빌려 논쟁적 이슈를 적극 제기하고 있다. 3월엔 돌봄 비용을 낮추기 위해 돌봄 서비스의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하자고 했고, 6월엔 한국의 의식주 비용이 높다며 농산물 수입 확대를 제안했다. ▷통화정책을 다루는 한은이 입시경쟁 문제에 주목하는 논리는 이렇다.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한 과도한 교육열이 서울 쏠림과 집값 급등, 저출산 등으로 이어지고, 이는 경제의 성장잠재력을 낮춰 금융 불안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한은의 관심 영역이 아닌 곳이 없다. “자녀를 낳으면 정년을 연장해 주자”는 내부 기고문도 있었고, 비수도권 거점 도시를 중심으로 균형 발전의 패러다임을 전환하자는 등의 수도권 집중 완화 방안도 제시됐다. ▷이 총재는 취임 이후 통화정책만으론 장기 저성장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구조개혁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구조개혁의 당위성을 설파하는 수준을 넘어 한은이 직접 해법을 찾으려는 모양새다. 문제는 금융 분야에 특화된 한은이 내놓는 각종 해법이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데 있다. 주요 대학 신입생 선발인원을 지역별 인구비례로 할당하자는 정책을 교육부가 내놨다면 입시 현장을 모르는 획일적인 규제라는 비판이 들끓지 않았을까. 우리 사회의 복잡다단한 문제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어내듯 단칼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작 금리와 가계부채에 대한 한은의 해법은 모호하기만 하다. 금리를 올려야 할 때 제대로 올리지 못하더니, 이제 내려야 할 땐 내리지 못하는 상황에 빠졌다. 한은으로선 정부 탓을 하고 싶겠지만 한은 총재 역시 ‘거시경제금융현안간담회(F4회의)’의 멤버인 만큼 자유롭다고 할 순 없다. 이 때문에 한은이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두고 ‘구조적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며 금리정책 실패의 책임에서 회피하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한은이 집중해야 할 본연의 역할은 ‘모든 문제 연구’가 아니라 물가 안정과 금융 안정이지 않을까.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현대자동차가 누적 차량 생산 1억 대를 달성했다. 1968년 미국 포드 차량 조립을 시작으로 자동차 생산에 발을 내디딘 지 56년 만이다. 현대차에 앞서 1억 대를 생산한 업체는 미국의 GM과 포드, 일본의 도요타 닛산 혼다, 독일 폭스바겐 등 6곳뿐이다. 모두 100년 안팎의 역사를 자랑하는 업체들로, ‘1억 대 클럽’에 가입하기까지 60∼70년씩 걸렸는데 현대차가 최단기간 입성에 성공했다. ▷1억 대라고 하면 쉽게 감이 오지 않는다. 현대차에서 가장 많이 생산한 베스트셀링카 아반떼(전장 4710mm) 기준으로 한 줄로 늘어세우면 지구 둘레를 약 11.8바퀴 돌 수 있다. 엄청난 성과지만 출발은 소박했다. 1968년 11월 울산공장에서 1호 차량인 1600cc급 준중형 세단 ‘코티나’를 만들기 시작해 그해 533대를 생산했다. 기술이랄 것도 없었다. 부품 국산화율은 21%에 불과했고, 사실상 볼트와 너트를 끼워 맞추는 수준이었다. ▷현대차는 조립 생산에 만족하지 않고 1975년 첫 독자 모델인 ‘포니’를 양산하는 데 성공했다. 포니는 이듬해 한국 승용차 최초로 에콰도르 등 해외에 수출을 시작했다. 1986년엔 ‘포니 엑셀’로 자동차 본고장인 미국 땅을 밟았다. 1991년 국내 첫 독자 엔진인 ‘알파엔진’ 개발에 성공했고, 1994년엔 플랫폼 엔진 변속기까지 순수 국내 기술로 개발한 ‘엑센트’를 선보였다. 1996년 글로벌 1000만 대 생산을 달성했고, 이후 2013년 5000만 대, 2019년 8000만 대, 2022년 9000만 대로 가속페달을 밟았다. ▷현대차는 판매 대수 기준 세계 3위의 빅메이커로 우뚝 섰다. 스승들은 진작에 뛰어넘었다. 현대차에 처음 조립을 맡겼던 포드를 2010년 글로벌 생산량에서 제쳤고, 엔진과 변속기를 얻어 썼던 일본 미쓰비시는 아득히 넘어섰다. 경쟁사들이 주춤할 때 멈추지 않았다. 코로나19 당시 GM과 포드는 공장 가동을 멈췄지만 현대차는 생산을 유지해 점유율을 높였다. 도요타와 폭스바겐이 중국에 대한 높은 의존도로 생산에 발목이 묶여 있을 때 현대차는 미국, 인도 등 신시장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현대차 2억 대 시대로의 출발을 알린 1억1번째 생산 차량은 전기차 ‘아이오닉 5’였다.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의 전환을 상징한다. 미래차 시장에서 승리하려면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을 돌파하고 저가 공세를 앞세운 중국의 추격을 뿌리쳐야 한다. 최근 중국은 댓글부대를 동원해 “흉기차(현대차·기아를 비하하는 표현) 누가 타냐”는 식의 악성 인지전까지 펼치고 있다. 승리의 필살기는 여전히 품질과 신뢰다. 56년 전 첫 차를 만들던 마음 그대로 열정과 도전정신도 날카롭게 벼려야 할 것이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한국의 인구 이동, 특히 청년들의 이동은 수도권으로의 일방통행이다. ‘인서울’ 대학 진학을 통해 상경한 청년들은 학업을 마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지방에서 대학을 나온 청년들도 일자리를 찾아 다시 수도권으로 몰린다. 매년 10만 명의 청년이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향한다. 수도권으로 떠난 청년들이 비수도권에 남은 청년들보다 돈은 많이 벌지만 행복감은 더 낮고 ‘번아웃’(소진) 경험이 높다는 분석이 나왔다. ▷통계청이 26일 발간한 ‘통계플러스 가을호’를 보면 19∼34세의 비수도권 출신 청년 가운데 수도권으로 떠난 청년의 연평균 소득은 2022년 기준 2743만 원으로, 비수도권에 남은 청년(2034만 원)보다 709만 원(34.9%) 더 많았다. 청년 인구 대비 취업자 비중도 수도권으로 간 청년(72.5%)이 지역에 남은 청년(66.4%)보다 높았다. 1000대 기업 본사의 73.6%가 밀집해 기회가 더 많은 수도권으로의 이동이 취업과 소득을 위해서는 ‘합리적’ 선택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삶의 질을 보면 정반대였다. 수도권으로 떠난 청년이 느끼는 행복감은 10점 만점에 6.76점으로 비수도권에 남은 청년(6.92점)보다 낮았다. ‘최근 1년간 번아웃됐다고 느낀 적이 있다’고 답한 수도권 이동 청년은 42.0%로, 비수도권 잔류 청년보다 12.3%포인트 높았다. 수도권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청년들은 건강이 더 나빴고, 더 좁은 집에 살았다. 더 오래 일했고 통근 시간도 길었다. 높은 주거비 부담 때문에 빚도 더 많았다. 낯선 환경에서 느꼈을 두려움과 외로움은 통계 숫자론 담아낼 수 없다. ▷숨막히는 환경을 벗어나 가족과 친구가 있는 지방으로 돌아가려 해도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 두렵다. 가장 먼저 발목을 잡는 건 역시 일자리다. 지방에 살아본 청년들은 공무원 말곤 마땅한 사무직군의 정규직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일자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교통, 교육, 주거, 의료, 문화, 쇼핑 등의 인프라도 수도권에 비해 부족하다. 청년들을 지방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선 일자리와 인프라가 한곳에 모인 ‘도시 거점화’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청년들 앞에 놓인 현실은 축구장 반쪽에서 열리는 축구 경기 같다. 한쪽에선 공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몸싸움 속에 부상자가 속출하는데, 이를 지켜보는 반대쪽에선 그저 공을 만져볼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만으로도 부러울 뿐이다. 청년들이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계속 공부하고 좋은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번아웃과 열패감, 수도권 집중과 지역 소멸이 공존하는 마이너스 게임을 이젠 그만할 때가 됐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PC와 노트북마다 붙어 있던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라는 파란색 스티커는 품질 보증서였다. 인텔의 중앙처리장치(CPU)가 들어가 있다는 뜻으로, ‘반도체 제국’ 인텔을 상징하는 단어였다. 하지만 지금 제국은 붕괴의 위기에 놓여 있다. 미국 반도체 기업 퀄컴이 인텔에 인수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인수합병(M&A)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는 탄식이 나온다. 미국의 한 자산운용사가 인텔에 50억 달러(약 6조7000억 원) 투자를 제안한 것도 ‘제국’으로선 굴욕이다. ▷인텔의 적자 규모는 올해 1분기 3억8100만 달러에서 2분기 16억1000만 달러로 불어났다. 반도체 종목으로 구성된 필라델피아 반도체 지수가 올해 들어 20% 오르는 동안 인텔 주가는 55%나 빠졌다. 급기야 뉴욕 증시의 다우존스30산업평균지수에서도 퇴출될 위기에 몰렸다. 인텔은 전체 직원의 15%인 1만5000명을 해고하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부를 분사하는 등의 구조조정안을 내놨다. ▷인텔은 반도체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적회로(IC)를 발명한 로버트 노이스, 그리고 IC의 성능이 24개월마다 2배로 향상된다는 ‘무어의 법칙’을 만든 고든 무어가 함께 1968년 창업했다. 사명인 인텔(Intel) 자체가 ‘집적 전자공학(Integrated Electronics)’의 약어다. 1970년 세계 최초로 D램 반도체를, 1971년 최초의 CPU를 선보였다. 이후 PC 대중화와 함께 마이크로소프트(MS)와 ‘윈텔(윈도+인텔) 동맹’을 맺고 반도체 시장을 장악했다. ▷‘외계인을 납치해 기술을 개발한다’는 소문이 나올 정도로 기술력을 자랑했던 인텔은 이후 PC에서 모바일, 인공지능(AI)으로 넘어가는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지 못했다. 2006년 애플의 아이폰용 칩 생산 요구를 거절할 정도로 변화에 둔감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연구개발(R&D) 투자를 줄이면서 기술 경쟁력이 뒤처졌고, 조직이 비대화되며 의사결정은 굼떴다. “관료제가 인텔을 멍청한 회사로 만들어 놓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압도적 1등이던 인텔의 몰락은 반도체로 먹고사는 한국으로선 남의 일이 아니다. 급변하는 시장에서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 반도체를 비롯한 정보기술산업의 속성이다. 한때 휴대전화 시장을 호령하던 노키아와 모토로라가 스마트폰 시대로의 이행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나락으로 떨어졌던 것처럼, 혁신의 아이콘이 혁신을 게을리하다 도태된 사례는 차고 넘친다. ‘인텔의 굴욕’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이유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대출 규제 발언으로 시장을 혼란스럽게 했던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10일 “불편과 어려움을 드린 점에 대해 죄송하다”며 마침내 머리를 숙였다. 앞서 3월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사태, 7월 티몬·위메프(티메프) 미정산 사태 때도 사과한 적이 있지만, 감독기관 수장으로서의 관리 책임이 아닌 본인의 설화와 실책으로 고개를 숙인 것은 처음이다.낄 때 빠질 때 구분 안 하는 ‘실세 원장’ 그간 시장에선 ‘기준금리는 한국은행이, 대출금리는 금감원이 결정한다’고들 했다. 이 원장의 말 한마디에 시장이 요동쳤다. 7월 초 이 원장이 “성급한 금리 인하 기대에 편승한 대출 확대”를 우려하자 은행들은 20차례 넘게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높이며 몸을 사렸다. 대출 수요자들의 불만이 커지자 지난달 말엔 “대출금리 인상은 당국이 바란 게 아니다”라며 은행들을 질책했다. 이에 은행들이 대출에 빗장을 걸자 이달 4일 “실수요자들에게 부담을 줘선 안 된다”고 호통쳤다. 다음엔 또 무슨 말을 할까, 그저 이 원장의 입만 쳐다보게 됐다. 윤석열 대통령의 신임이 두텁다고 알려진 이 원장의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언론에 등장하는 횟수만 보면 국무총리나 기획재정부 장관 등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금융기관 감독과 가계부채 대응 등 본업 외에도 빠지지 않고 목소리를 냈다. 법무부 주무인 상법과 형법 개정, 기재부 업무인 상속세와 금융투자소득세, 금융위 소관인 은행 지배구조와 공매도 재개 등의 이슈를 모두 이 원장이 주도하는 모양새다. 국내에선 은행의 탐욕을 다그치고, 해외에 나가선 K금융을 세일즈하는 것도 이 원장의 몫이다. 검사 출신인 이 원장은 본인의 포지션을 ‘금융 분야의 검찰총장’으로 잡은 듯하다. 대한민국 모든 형사 범죄가 검찰총장의 손을 거치듯, 금융 전 분야가 금감원장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금감원이 상법 이슈를 챙기는 이유로 “자본시장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 시절 “총장은 법무부 장관의 부하가 아니다”라고 했듯, 이 원장도 직제상 상위인 금융위원장은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원장의 직설적 화법은 여전히 금융인보단 검사에 가깝다. 검찰은 범죄에 대한 엄정한 수사와 강력한 처벌을 강조하면 박수를 받는다. 하지만 금융에 대해선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섬세하고 신중해야 한다. 지난달 29일 윤 대통령이 국정브리핑에서 ‘정책대출의 금리’라고 해야 할 것을 ‘정책금리’라고 말하자 기준금리 인상으로 오해한 외국인들의 매도로 채권시장이 한때 출렁였다. 이 원장이 독주하는 데는 금융위의 책임도 피하기 어렵다. 현행법상 금융위는 금융 정책, 외국환업무 취급기관의 건전성 감독 및 금융감독에 관한 업무를 총괄하고, 금감원은 금융위의 지도·감독을 받아 금융기관에 대한 검사·감독 업무를 수행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현 정부 들어서는 실세 원장을 앞세운 금감원의 힘이 금융위를 압도했다. 여당 국회의원들조차 신임 김병환 금융위원장의 인사청문회에서 “금융 당국 수장이 누구인지 헷갈린다”고 했을 정도다.금융위원장-금감원장 역할 정리부터 금융위는 존재감이 없고, 금감원은 전방위로 칼춤을 추면서 일각에선 이참에 금융감독 체계를 전면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금융산업 정책과 금융감독 정책을 분리하자는 법안이 최근 국회에 발의된 상태다. 감독 체계 개편은 성급하게 추진할 일은 아니다. 현행법대로 금융위는 금융 정책 및 감독을 총괄하고 금감원은 감독 실무를 수행한다는 원칙부터 확립해야 한다. 금융위원장과 금감원장 둘 다 ‘정명(正名)’을 되찾는 게 우선이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현대차·기아가 글로벌 3대 신용평가사로부터 ‘올 A’를 받았다. 최근 미국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현대차·기아의 신용등급을 BBB+에서 A-로 상향했다. 신용평가사들은 현대차·기아를 묶어서 평가한다. 앞서 2월 미국 무디스와 영국 피치도 두 회사 신용등급을 A등급 단계로 올렸다. 세계 완성차 업체 중 모두 A등급을 받은 회사는 현대차·기아와 독일의 벤츠, 일본의 도요타와 혼다 등 4곳뿐이다. 판매 대수 기준 세계 3위에 오른 데 이어 재무 건전성 등 질적인 측면에서도 인정받은 셈이다. ▷올해 들어 현대차·기아에 대한 평가가 높아진 것은 실적 개선과 유연한 생산 능력, 현금 창출 능력 때문이다. 현대차·기아는 지난해부터 분기마다 역대 최대 실적을 다시 쓰고 있다. 올해 상반기 매출액 139조4599억 원, 영업이익 14조9059억 원을 거뒀는데, 영업이익률은 10.7%로 세계 완성차 업체 중 가장 높다. 2분기엔 판매량이 줄었는데도 매출과 이익이 늘었다.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제네시스 등 고급차 위주로 차량 구성이 재편됐기 때문이다. ▷내연기관차와 하이브리드차, 전기차 모두를 만들 수 있는 유연한 생산 능력도 현대차·기아의 강점이다. 전기차만 생산하는 테슬라, 하이브리드차에 주력하는 도요타와 달리 시장 상황에 따라 생산량을 조절할 수 있다. 우산과 짚신을 모두 팔아 날씨에 구애받지 않는 사업구조를 갖춘 셈이다. 현대차가 인도에서 최대 30억 달러(약 4조 원) 규모의 기업공개(IPO)를 추진하고 있는 것도 유동성 확보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해외의 시선 역시 달라졌다. 올해 2월 미국 경제방송 CNBC는 ‘현대차그룹은 어떻게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자동차 기업이 됐을까’라는 제목의 15분 분량의 방송 리포트에서 현대차·기아가 약진한 비결을 집중 분석했다. 로보틱스, 자율주행, 미래항공모빌리티 등 경쟁 업체들이 포기한 영역에도 투자를 지속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자동차 분야의 오스카’라고 불리는 월드카 어워즈에서 현대차·기아의 아이오닉, EV9 등은 2022년부터 3년 연속으로 ‘세계 올해의 차’에 선정됐다. ▷해외 진출 초기 현대차의 홍보 전략은 ‘다른 차 한 대 값으로 우리 차 두 대를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종의 반값 떨이 내지 ‘1+1’ 전략이다. 한국 경제에서 이제 자동차는 다른 의미로 ‘1+1’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 수출 부진으로 나라 전체가 어려울 때 자동차는 역대 최대 실적을 앞세워 수출을 떠받쳤다. 반도체라는 단발 엔진으로 버티던 한국 경제가 쌍발 엔진을 장착한 것이다. 현대차·기아의 질주가 계속돼야 할 이유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요즘 금리가 수상하다. 자고 일어나면 대출금리가 오른다. 지난달 이후 KB국민, 신한, 하나, 우리, 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이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올린 게 20차례나 된다. 기준금리 인하 기대감에 따라 대출금리가 내려갈 것으로 예상하고 내 집 마련을 계획하던 사람들은 허탈감에 빠졌다. 지난달 초 금융당국이 은행 부행장들을 불러 모아 대출을 관리하라고 엄포를 놓으면서 나타난 현상이다.몇 달 전으로 시간을 돌리면 상황은 정반대가 된다. 은행들은 금리 인하 경쟁을 펼쳤다. 정부는 여러 은행의 주택담보대출을 비교해 싼 이자로 갈아탈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대출 갈아타기 서비스를 주도한 공무원들을 대통령이 직접 언급하며 칭찬했다. 대출금리를 내린 것도, 몇 달 뒤 올린 것도 은행이 아닌 정부인 셈이다.》21일 강태수 KAIST 금융전문대학원 초빙교수를 만나 시장을 혼란스럽게 하는 ‘관치 금리’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지 물어봤다. 강 교수는 한국은행에서 30년 이상 근무하며 통화금융팀장, 금융안정분석국장, 금융안정 담당 부총재보를 지낸 금융 전문가다. 그는 정부의 대출금리 개입에 대해 “금융 선진국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시장금리는 내려가는데 대출금리는 거꾸로 오르고 있다. “국고채 금리, 시장금리의 하락은 미국과 한국의 기준금리 인하 기대가 자연스럽게 반영된 결과다. 시장 메커니즘은 시장 참가자들의 기대, 수요와 공급 등을 통해 결정돼야 하는데 대출 역주행은 이를 거스르는 현상이다. 당국이 창구지도를 하고 은행의 팔을 비트는 식으로 대출금리 인상을 유도하는 것은 정상적인 방법이라고 보기 어렵다.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정하고, 그에 따라 시중금리가 움직이고, 이에 맞춰 기업과 가계가 의사 결정을 하는 것이 정상적인 통화정책의 파급 경로인데 완전히 왜곡돼 버렸다. 시장 참여자들도 금리가 오를지 내릴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 ―해외에서도 이런 일이 발생하나. “글쎄 후진국에선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알 만한 금융 선진국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혹시 몰라 다른 동료 전문가들에게 그런 사례가 있나 물어봐도 피식 웃기만 하더라. 개입하더라도 한국처럼 모두가 알 정도로 이렇게 대놓고 파열음을 내면서 하진 않을 것이다. 행정지도 방식의 직접적인 금리 통제는 아주 후진적이다. 이렇게 했을 때의 파장과 반작용도 고려해야 한다.”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나. “정부는 자본시장과 외환시장의 선진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가 은행 대출금리까지 간섭하는 모습을 보면 외국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나.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정부가 금융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여길 것이다. 한국 증시의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선진국 지수 편입, 한국 국채의 세계국채지수(WGBI) 편입을 위해 정부가 총력을 다하고 있는데 이런 부분에서 발목이 잡히는 것이다. 긴 호흡으로 보지 않고 우선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해결하려다 보면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점점 늘어나게 된다.” ―대통령의 ‘은행은 공공재’ ‘돈잔치’ 발언 이후 관치가 심해졌다는 지적이 있다. “대통령이 지적한 부분은 일리는 있다. 우리 금융기관들이 예대마진에만 의존해 이자 장사에 몰두해 왔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관치에 안주해 온 은행들이 반성할 부분도 많다. 하지만 대통령의 발언 이후 감독 당국이 우리 금융을 어떻게 업그레이드해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게 할지를 고민해야 했는데 손쉽게 은행 때리기에만 치중한 게 문제다. 소규모 특화 은행 육성 등의 혁신 노력도 했지만 지난해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사태를 겪으면서 쑥 들어가 버린 건 아쉽다.” ―금융감독 당국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는가. “금융감독원이 금융회사 지배구조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데 사실 금감원 스스로의 지배구조도 돌아봐야 한다. 금감원이 모든 금융기관의 감독권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럼 금감원은 도대체 누가 감독하느냐’의 문제가 남는다. 금감원은 금융감독의 효율성을 높인다는 취지에서 은행·증권·보험감독원, 신용관리기금을 합친 통합감독기구로 1999년 출범했다. 영국의 금융감독청(FSA)을 모델로 했다. 하지만 정작 FSA는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2013년 해체됐다. 건전성 감독 업무는 영국은행(BOE) 산하의 건전성감독청(PRA)으로, 금융소비자 보호 감독은 독립기구인 금융행위감독청(FCA)으로 이관했다. 모든 감독 기능이 한 지붕 아래 있으면 상호 견제가 안 된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이복현 금감원장 취임 이후 금감원이 전면에 나서는 느낌이다. “금감원이 상법 개정, 기업 밸류업(가치 제고) 등의 이슈를 주도하고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그런데 진짜 챙겨야 할 일은 못 하고 있는 것 같다. 최근 카카오페이가 고객 동의 없이 4000만 명의 개인정보를 넘긴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다. 그런데도 감독 당국이 몇 년 동안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티몬·위메프 환불 중단 사태도 사전에 대비하지 못하고 뒷북을 치고 있다. 국민들이 정말로 바라는 것은 이런 문제를 제대로 관리하고 단속하라는 것이다.” ―검사 출신 원장의 문제는 아닐까. “외부 출신이 오면 조직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장점이 있다. 그런 면에서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부분도 있다고 본다. 다만 수사기관의 관점이 아니라 금융계의 문화나 문법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외부에서 원장의 행보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가 나오고 국민에게 그렇게 인식된다면 스스로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정부·여당에서 한은에 금리 인하를 압박하는 듯한 발언이 나온다. “미국에서도 논란이다.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는 미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결정 과정에 대통령이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민주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연준은 독립적인 기관이며 대통령으로서 난 연준이 하는 결정에 절대로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을 했다. 해리스 후보의 말이 맞다고 본다.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정부 얘기는 참고만 하고, 경제 및 금융 상황과 데이터에만 집중해서 독립적으로 금리 결정을 잘할 것으로 기대한다. 개인적으로는 원팀임을 강조하는 이른바 ‘F4(Finance4·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금감원 한은 수장을 의미)’ 회의는 한은의 독립성을 고려할 때 어색해 보인다.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과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이 얼굴을 맞대고 악수하는 모습, 일본은행 총재와 재무장관이 만나는 그림이 상상이 되나.” ―통화정책과 금융정책이 엇박자를 보이는 경우도 많았다. “통화당국과 재정당국의 의견이 다른 것은 정상이다. 사안을 똑같이 볼 수는 없다. 다만 한국 경제의 가장 큰 취약점인 가계부채와 부동산 문제에서는 방향을 맞춰 함께 해법을 모색했어야 했다. 한은이 통화 긴축을 하는데 정부는 대출금리를 낮춰 버리고, 이제 기준금리를 내리려는데 당국이 대출금리를 올리는 식의 엇박자는 문제다. 한쪽에서 에어컨 틀고, 다른 쪽에선 보일러 켜는 식이면 정책이 작동될 리 없다. 고금리 상황에서 가계부채와 부동산 문제는 확실히 해결하고 갔어야 했는데 아쉽다. 정부가 부동산 경기 연착륙을 대전제로 깔고 저금리 정책대출을 크게 늘리고 스트레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등 대출 규제를 늦추면서 실기한 측면이 있다.” ―9월 미 연준의 금리 인하가 확실시되는 상황이다. “미국과 한국의 물가와 금융 안정 상황은 다르다. 방향성은 같다고 해도 속도와 내용은 다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지금은 정부의 개입으로 통화정책의 효과가 많이 왜곡된 상황이다. 그런 측면에서 한은이 시장과 커뮤니케이션을 굉장히 섬세하게 해야 할 시점이다. 22일 한은은 기준금리를 동결하면서 “현 상황에서 금리 인하는 부동산 가격을 부추길 위험이 더 크다”고 했다. 결국 향후 인하를 하더라도 가계부채, 부동산 시장을 자극하지 않을 만큼만 내리겠다는 메시지로 보인다. 다만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 폭이 예상보다 더 커진다면 한은이 이 같은 스탠스를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통화금융정책 당국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부동산, 가계부채 문제 해결이다. 미래 세대인 청년층이 굉장한 좌절감과 절망감을 느끼는 부분이기도 하다. 정책 당국자들은 항상 미래 세대를 염두에 둬야 한다. 정책을 펼 때마다 ‘누구를 위한 정책이냐’ ‘이렇게 하면 미래 세대에게 도움이 되느냐’를 계속 되물어야 한다. 이러면 내 집 마련 쉽게 해주겠다고 50, 60대에게까지 50년 만기 주담대를 내주고, 대출 총량 규제를 한다며 청년들의 대출까지 일괄적으로 막아버리는 식의 정책은 나오지 않는다. 단기적 관점에서 냉탕 온탕을 오가는 식의 정책 운용도 크게 줄어들 것이다.” 강태수 교수△ 1958년 서울 출생△ 1993년 미주리대 경제학 박사△ 1982∼2014년 한국은행 통화금융팀장, 금융안정분석국장, 부총재보△ 2012∼2014년 바젤은행감독위원회(BCBS) 위원△ 2014∼2020년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0년∼현재 KAIST 금융전문대학원 초빙교수△ 2022년∼현재 금융위원회 자체규제심사위원장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변덕스럽기가 기후변화 못잖다. 금리 인하 기대감과 인공지능(AI) 열풍으로 ‘서머랠리’(여름 강세장)를 외치던 글로벌 주식시장 분위기가 한여름 때아닌 한파에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미국 경기 침체의 공포와 ‘AI 거품론’에 2일 아시아 증시는 ‘검은 금요일’을 연출했다. 코스피는 3.65% 급락하면서 50여 일 만에 2,700 선이 뚫렸다. 일본 닛케이평균주가는 5.81% 폭락해 36년 10개월 만에 가장 큰 하락 폭을 보였다. ▷불안한 투심에 불을 지핀 것은 AI 산업에 대한 회의론이다. 미국 소비와 고용이 침체되면서 AI 투자가 계속될 수 있을지, 실제 수익으로 이어질지 불안감이 커졌다. AI 열풍을 대표하는 엔비디아는 6월 중순 세계 시총 1위에 오르며 화려한 대관식을 치르자마자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전고점이던 지난달 11일 이후 한 달도 안 돼 20% 가까이 주가가 떨어졌다. 시총 4조 달러 선점 경쟁을 벌이던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엔비디아는 이제 뒤로 달리기 경쟁을 하고 있다. ▷일각에선 AI 시장을 2000년대 초 ‘닷컴 버블’에 빗대고 있다. 엔비디아의 부상과 위기를 보면서 1990년대 후반 인터넷 네트워크 장비 시장을 장악하며 단번에 빅테크 반열로 올랐다가 주가가 폭락한 시스코를 떠올린다. 챗GPT의 충격과 찬탄은 잦아들기 시작했고 이제 시장은 AI로 돈을 벌 수 있는지 증명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벤처캐피털(VC)인 세쿼이아캐피털은 “주요 빅테크의 AI 투자는 연간 6000억 달러(약 822조 원)에 이르지만, 수익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1000억 달러(약 137조 원) 미만”이라고 분석했다. ▷AI 진화 속도에 맞춰 인프라가 뒤따를지도 의문이다. 특히 전력이 제대로 공급될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전기 먹는 하마’인 AI 데이터센터 등으로 2030년 미국의 AI 전력 수요는 2023년 대비 80배 이상 급증할 것으로 전망되는데, 전력 공급 인프라를 단기간에 구축하기는 쉽지 않다. 모두가 밝은 미래를 의심치 않았던 전기차 시장이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에 빠졌듯이 산업의 성장은 불균형을 피할 수 없다. ▷AI라는 용어는 1955년 컴퓨터 과학자 존 매카시가 발표한 ‘지능이 있는 기계를 만들기 위한 과학과 공학’이라는 논문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후 AI에 대한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며 1970년대 초반과 1980년대 후반 두 차례의 혹독한 겨울을 겪어야 했다. AI의 미래가 장기적으로 낙관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과정은 꽃길이 아닌 굽이굽이 비탈길이다. 이번 위기가 ‘세 번째 겨울’의 전조일지, 아니면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일지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최근 한 유튜브 채널에는 버스 기사가 고속도로에서 경험한 황당한 목격담이 소개됐다. 고속도로 1차로를 달리고 있는데 앞에서 신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 비틀비틀 저속 주행하고 있었다. 상향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주의를 줬지만 변화가 없었다. 차로를 바꿔 추월하면서 살펴보니 운전자는 주행보조 시스템을 켜놓은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최근 들어 주행보조 기능만 믿고 운전을 태만하게 하다 사고를 유발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운전자들이 장거리 주행 때 즐겨 활용하는 대표적 주행보조 장치가 ‘크루즈 컨트롤’로 불리는 ‘적응형 순항 제어 기능(ACC)’이다. 전방 차량을 인식해 앞차와의 거리를 유지하고, 운전자가 설정한 속도로 주행하게 도와준다. 자율주행 1∼5단계 중 2단계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제조사마다 현대차·기아는 SCC(스마트크루즈), 일본 도요타는 DRCC(다이내믹 레이더 크루즈), 미국 테슬라는 AP(오토 파일럿) 등으로 명칭이 다양하다. ▷운전자들이 ACC에 지나치게 의존해 전방 주시를 게을리하다가 돌발 상황에 대응하지 못해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2020년부터 올해 7월까지 고속도로에서 ACC 이용 중 19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해 17명이 사망했다. 올해에만 8건의 사고로 9명이 숨졌다. 5월 호남고속도로에서도 교통사고 현장 관리 중이던 한국도로공사 순찰차를 뒤따르던 승용차가 추돌해 공사 직원이 사망했는데, 가해 차량이 ACC 작동 상태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ACC는 건조한 노면과 평지, 일반적인 중량을 기준으로 설정돼 있기 때문에 비나 눈, 안개와 같이 기상 상황이 좋지 않은 경우 카메라와 센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젖은 노면에서는 제동 거리가 늘어나 앞차와의 거리 유지가 어렵다. 탑승자가 많아 차량 무게가 늘어난 경우나 내리막길, 굽잇길에서도 사고가 발생할 위험이 크다. 앞선 차량의 속도가 느리거나 정차한 경우, 공사 중이거나 사고 처리 중인 경우에 제때 속도를 줄이지 못해 추돌할 수 있다. 사용 설명서에 적힌 인식 제한 상황을 미리 확인해야 한다. ▷미국 고속도로안전보험협회(IIHS)와 고속도로사고데이터연구소(HLDI)가 보험 데이터와 사고 기록을 분석해 보니 주행보조 시스템을 장착했다고 해서 충돌 보상 청구율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감소하지 않았다. IIHS는 “주행보조 시스템이 거짓된 안정감을 주고 지루함을 유발해 운전자가 집중력을 잃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안전기능이 아닌 전동 창문이나 열선 시트 같은 편의기능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결국 안전 운전을 책임지는 것은 운전자 자신임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공무원을 흔히 ‘공복’이라고 하지만 요즘 젊은 공무원들은 스스로를 ‘공노비’라고 자조한다. ‘복(僕)’이 종이나 머슴을 뜻하니 차이가 없는 것도 같지만 어감은 완전히 다르다. 공복은 국민에 대한 봉사자이지만 공노비에겐 보람과 사명감이 없다. 박봉에 업무는 과중하고 악성 민원에 시달리기 일쑤다. 경직적 조직문화에 자율성을 발휘하기도 쉽지 않다. 힘들다고 하소연하면 ‘누칼협(누가 칼 들고 공무원 하라고 협박했나)’이라는 비아냥만 돌아온다. ▷한국행정연구원이 중앙행정기관 공무원 1021명을 대상으로 가치관 조사를 한 결과를 연세대 행정학과 연구진이 추가로 분석해 보니 공무원 10명 중 3명은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 상태인 것으로 조사됐다. 실제로 사직은 하지 않으면서 최소한의 업무만 하겠다는 태도로 자리만 지키는 것이다. 응답자의 32.52%(332명)가 ‘조직이 원하더라도 추가적인 직무를 맡을 용의가 없다’고 했다. 일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을수록, 연령이 낮을수록 조용한 사직 가능성이 높아졌다. ▷최근 공직사회는 박봉과 악성 민원, 낡은 조직문화 등으로 크게 위축된 상태다. 올해 9급 초임(1호봉) 공무원의 월평균 급여액은 222만2000원(세전)으로, 주휴수당을 포함한 월 최저임금보다 16만 원 많은 수준이다. 하루에만 평균 100건씩 생기는 악성 민원에 시달려 극단적 선택을 하는 공무원까지 나왔다. 선망의 대상이던 공무원의 인기는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 올해 국가공무원 9급 공채 시험 경쟁률은 21.8 대 1로, 1992년 이후 32년 만에 가장 낮았다. 재직 기간이 5년이 안 된 공무원 퇴직자는 지난해 1만3566명으로 5년 만에 2.4배로 늘었다. ▷조직문화는 무기력을 학습시킨다. 한국행정연구원이 공직을 떠난 청년들에게 물어보니 국민의 삶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공직 문을 여는 순간 깨졌다고 했다. 갓 배치되자마자 인수인계도 없이 수억 원의 예산 편성을 떠넘기며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순환보직으로 1, 2년 뒤 다른 자리로 옮기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반복됐다. 능력 있으면 보상과 대우가 좋아지는 게 아니라 업무 부담만 늘어났다. ▷고위 공무원들도 다르지 않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극단을 오가는 정책 기조에 따라 눈치를 봐야 한다. 일을 열심히 하면 직권남용, 안 하다간 직무유기가 될 수 있다. 소신과 적극 행정은 접고 적당히 소극 행정을 하는 게 안전하다는 보신주의가 몸에 밴다. 직원들이 잠재적 퇴사 상태인 회사의 미래가 밝을 수 없다. 젊은 인재들은 공무원 되기를 꺼리고, 기존 공무원들은 자리만 지키려는 분위기에서 국가 행정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