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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은 개인 하기 나름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회적 요인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미국은 인종에 따라 기대수명 차이가 크다. 아시아인이 84.5세, 백인 77.5세, 흑인 72.8세, 원주민 67.9세 순이다. 영국에선 부촌에서 태어난 아이가 가난한 동네 아이보다 12년 더 오래 산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부자가 더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윤석준 고려대 예방의학교실 연구팀이 2008∼2020년 건강보험 데이터를 이용해 소득 수준(5개 등급)에 따른 기대수명을 분석한 결과 2020년 최상위 소득계층이 87.4년으로 최저 소득층보다 7.9년 더 오래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별 이상 없이 생활하는 기간을 뜻하는 ‘건강수명’ 격차는 더 컸다. 최상위 계층이 74.9년으로 최저소득 계층보다 8.7년 더 길었다. 기대수명과 건강수명 모두 소득 수준에 따른 격차가 해마다 더 벌어지는 추세를 보였다. ▷건강과 수명을 결정하는 요인으로는 경제력, 주거 환경, 식습관, 사회관계 등이 꼽히는데 특히 의료 서비스 접근성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부자들이 사는 동네에는 큰 병원과 실력 있는 의사들이 많다. ‘종합병원에 1시간 30분 이내 접근이 불가능한 인구 비율’은 의료 여건이 좋은 곳은 0%이지만 나쁜 곳은 42%나 된다. ‘지역응급의료센터에 30분 이내 접근이 불가능한 인구 비율’은 지역별로 0∼57%로 격차가 더 크다. 이 때문에 소득 수준별로 응급 상황이나 급성 심뇌혈관질환으로 인한 사망률 차이가 크게 난다. 제때 치료를 받았더라면 피할 수 있는 사망률(회피가능사망률)의 경우 최저소득 계층이 최고층보다 1.4배 더 높다. ▷부자들은 급성 질환뿐만 아니라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같은 만성 질환을 앓는 비율도 낮다. 많이 벌수록 술과 담배를 덜하고, 적당한 유산소 운동과 균형 잡힌 식단으로 건강과 비만을 관리하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질병관리청 2023 국민건강영향조사). 건강은 대물림된다. 유전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생활 환경과 습관을 그대로 물려받아 부모 세대 건강 격차가 자녀 세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금융자산이 10억 원 이상인 부자들은 일반인보다 아침 식사를 하는 비율이 높고, 종이신문과 연간 10권의 책을 읽으며,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횟수도 많았다(‘2024 대한민국 웰스 리포트’). 아침을 먹으면 폭식을 예방하고, 하루 30분 이상 읽으면 사망할 확률이 줄어들며, 가족 간 유대는 심리적 안정에 필수 요소다. 평범해 보이는 이런 장수 생활 습관도 먹고살기 힘든 이들에겐 사치일 수 있다. 의료 불평등 못지않게 경제 양극화 완화에 힘써야 건강 불평등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조기를 게양한 채 을사년 새해를 맞이할 줄은 몰랐다. 정부는 무안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하고 전국에 합동분향소를 설치했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은 “정부 수반의 대행으로서 비통하고 송구한 마음”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비상계엄 사태를 일으켜 놓고 수습은커녕 재난 대응 컨트롤타워 곳곳을 구멍 낸 정치권은 더욱 송구한 마음이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실패한 계엄 후 여야 간 예측 불허의 정쟁에 대해 외신은 ‘오징어 게임’ 같다고 보도했다. 탄핵이든 수사든 피해가며 어떻게든 자리를 보전하려는 윤 대통령, 그런 대통령을 빨리 끌어내리고 조기 대선에서 승리해 자신의 사법 리스크를 털어내려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벌이는 혈투다. 얼마 전 공개된 ‘오징어 게임 2’가 반짝 흥행으로 끝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는 리얼리티쇼 ‘오징어 게임 계엄편’이 훨씬 극적이고 잔혹한 탓도 있을 것이다. 비석치기, 제기차기, 공기놀이로 승부를 가리는 드라마 ‘오겜2’와 달리 ‘오겜 계엄편’을 이해하려면 헌법 지식이 필요하다. 첫 번째 게임 ‘대통령 탄핵소추’가 이 대표 승리로 끝나고 한덕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됐다. 두 번째 게임은 대통령 탄핵 여부를 결정할 헌법재판소 9인 체제 복원을 위한 ‘헌법재판관 3명 임명하기’. 뜻밖에 한 대행이 ‘여야 합의가 우선’이라며 임명을 보류하면서 결과적으로 대통령을 도운 ‘깐부’가 됐고, 대본에 없던 ‘한 대행 탄핵소추’와 ‘의결정족수’ 게임이 추가됐다. 이제 주인공은 최 대행. 그가 전임자와 달리 여당과 민주당이 추천한 헌법재판관 1명씩 2명을 임명하면서 탄핵심판 무력화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피해가게 됐다. ‘오겜 계엄편’의 출연진도 드라마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12개 혐의로 5개의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는 자신을 수사한 검사들은 ‘이재명 괴롭힌 죄’를 물어 탄핵하고 방탄용 입법을 남발하는 독한 빌런임에도 당내에선 ‘민주당 아버지’ ‘신의 사제’로 추앙받는다. 그런 이 대표도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으로서 헌법과 법률을 무시하고 계엄을 하려다 체포영장을 받아 든 경쟁자에 비하면 평범해 보일 지경이다. 통계학자인 아버지와 화학을 전공한 어머니 슬하에서 법학을 공부했건만 대통령 주변에선 법사와 도사와 보살들이 측근 자리를 놓고 신통력 경쟁을 벌였다. 부인도 “웬만한 무당보다 낫다”고 자부하는 인물이다. 동양철학자 임건순 씨에 따르면 무속은 철저한 현세주의이고, 모든 잘못은 남 탓, 악귀 탓이다. 무속에 빠진 사람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고 “나 감옥 가느냐”를 묻는다. 여사 의혹은 야당의 악마화 탓, 총선 대패는 선거 부정 탓, 비상계엄 선포는 야당의 입법 독주 탓이다. 대선 후보 시절 손바닥에 ‘왕(王)’자를 써 넣고 다닐 때 망국적 주술 정치를 예고하는 복선임을 눈치챘어야 했다. 참담한 사고로 잠시 멈춘 정쟁은 4일 애도 기간이 끝나면 재개될 것이다. 개인 목숨을 건 드라마와 달리 현실 속 오징어 게임엔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다. 계엄 사태로 주가가 내려앉고 원화 가치가 추락해 국제 투기 자본들이 알짜배기 기업을 헐값에 쓸어 담으려 어슬렁거리고 있으니 게임을 지속하는 건 경제적 자해 행위다. 제주항공의 아찔한 동체 착륙을 TV로 지켜본 사람들은 대내외적 난기류에 휩싸인 대한민국호가 비상 착륙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살아남을 수나 있을지 공포감을 느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은 조종석에서 제 발로 걸어 나올 용기도, 책임감도 없어 보인다. 그가 계엄 날 지시했다는 “총을 쏴서라도” “도끼로 문 부수고”를 검찰 공소장에서 확인한 정신과 전문의들은 수사보다 치료가 급하다고 한다. 헌재의 탄핵 심리 절차를 밟는 방법밖엔 없다. 아무리 못났어도 대통령을 파면한다는 건 주권자의 민주적 의사 결정을 파기하는 일이다. 9인 완전체라야 그 결정이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4월이면 대통령이 지명한 2명의 재판관 임기 만료가 돌아오는데 그때까지 탄핵 심리가 끝나지 않으면 다시 6인 체제가 되는 상황도 감안해야 한다. 결국 윤 대통령을 배출한 죄 있는 여당이 수습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길 기대한다. 헌재 9인 체제 복원을 위한 여야 협의에 적극 나서고, 최 대행이 거부권을 행사한 ‘내란죄 특검법’과 ‘김건희 특검법’도 위헌 조항을 뺀 수정안으로 야당 동의를 얻어 ‘부부의 난’을 단죄하라. 제주항공 희생자 179명을 위해 울리는 조종(弔鐘)은 더 이상 한눈팔지 말고 앞을 똑바로 보라는 경종(警鐘)으로 들어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비상계엄 사태와 관련해 풀리지 않은 의문은 대체 왜 그 무모한 일을 벌였느냐다. 윤석열 대통령은 ‘거대 야당의 의회 독재’를 이유로 들었다. ‘김건희 여사 수호 계엄설’ ‘명태균 황금폰 유출 제지용’이라는 해석도 제기된다. 계엄의 동기를 이해하려면 질문을 바꿔볼 필요가 있다. 언제부터 계엄을 모의한 것인가. ▷가장 눈여겨볼 시점이 계엄을 총지휘한 김용현 국방부 장관 인사다. 대통령은 8월 12일 김 당시 대통령경호처장을 국방부 장관에 지명하기 위해 임명된 지 1년도 되지 않은 외교안보 라인을 돌연 교체했다. 미 대선을 85일 앞둔 시점의 깜짝 인사에 ‘말 못 할 사연이라도 있는 게 아니냐’는 뒷말이 나왔다. 당시 대통령실은 ‘여름휴가 중 숙고를 마친 결과’라고 했는데 공교롭게도 대통령이 휴가 때 함께 골프 친 부사관들이 이번 계엄 과정에서 국회에 투입된 707특임단 소속이라는 야당 측 주장이 나왔다. 또 당시 부하 여단장과의 하극상 사태로 경질설이 돌던 문상호 정보사령관이 김 전 장관의 인사로 살아남아 함께 계엄을 준비했다고 한다. ▷민주당이 계엄 의혹을 제기한 때도 이즈음이다. 김민석 최고위원은 8월 17일 “국방부 장관의 갑작스러운 교체와 대통령의 뜬금없는 반국가 세력 발언으로 이어지는 최근 정권 흐름의 핵심은 북풍 조성을 염두에 둔 계엄령 준비 작전”이라고 주장했다. 윤 대통령은 ‘뉴라이트 역사관’ 논란으로 광복회와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열린 광복절 경축식에서 “검은 선동 세력에 맞서 싸워야 한다”, 이후 국무회의에선 “반국가 세력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며 비판 세력에 대한 노골적 적대감을 드러냈다. ▷국방부 장관 교체가 계엄 준비 작전이라면 계엄 구상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올 3월 윤 대통령과 저녁 자리에서 ‘조만간 계엄을 하겠다’는 말을 들은 신원식 당시 국방부 장관(현 국가안보실장)이 경호처장이던 김 전 장관 등을 불러 이를 막기 위한 대책 회의를 했다고 한다. 여인형 방첩사령관은 “지난해 말 대통령이 비상조치가 필요하다고 얘기했다”고 진술했다.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이 전북 군산의 무속인을 찾아 지난해 초부터 ‘앞으로 일을 벌일 것’이라고 하고, 군인 10여 명의 이름을 건네며 “나를 배신할 놈이 있는지” 물었다는 언론 보도도 나왔다. ▷야당의 계엄 의혹 제기에 대통령실은 “나치 스탈린 전체주의의 선동정치”라며 펄쩍 뛰었다. 또 “민주당 의원들의 머릿속엔 계엄이 있을지 몰라도, 저희의 머릿속에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허황된 음모론이라 무시하고 넘어갔던 계엄이 대통령 머릿속엔 오래전부터 자리하고 있었던 듯하다. 자기만의 성채에 갇혀 널리 듣지도, 질문받지도 않는 지도자란 얼마나 위험한가. 비상식적인 국정 운영과 황당한 발언을 더 의심하고 따져 물었어야 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으로 직무 정지를 당한 후 대통령의 입 역할을 하는 이가 ‘40년 지기’ 석동현 변호사다. 윤 대통령의 법률 대리인도 아니고 ‘윤 대통령의 변호인단 구성을 돕고 있는’ 석 변호사가 대변인 역할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가 전하는 대통령의 입장은 기함할 지경이다. “내란이 아닌 소란” “체포의 ‘체’자도 꺼내지 않았다”더니 23일엔 “비상계엄 하나로 수사하고 탄핵한다”며 “굉장히 답답하다는 토로를 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수사보다 탄핵 심판이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25일 공수처의 2차 출석요구에도 불응할 계획이다. 석 변호사는 “폐쇄된 공간에서 수사관과의 문답을 통해 대통령의 입장과 행위의 의미를 설명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했다. 대통령은 권한이 일시 정지됐을 뿐 “엄연히 대통령 신분”이어서 “대통령이 오란다고 가고 그런 것은 아니지 않나”라는 주장이다. 법조계에선 곧 재판에 넘겨지는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수사 기록을 보고 변론 전략을 세우려고 시간을 끌고 있다고 본다. ▷탄핵 심판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것도 아니다. 대통령이 서류 수령을 거부하자 헌법재판소는 23일 송달 효력이 발생한 것으로 보고 27일 첫 변론 준비 기일을 진행하기로 했지만 석 변호사는 “탄핵소추 된 지 10일도 안 됐다”며 불참을 시사했다. 윤 대통령은 최근 입장문을 통해 계엄 선포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한 바 있다. 송달된 서류는 거부하면서 장외에선 여론전을 펼치니 구차한 지연작전이란 말이 나오는 것이다. ▷“계엄 하나로…” 발언은 그깟 ‘경고성 계엄’으로 무거운 사법적 심판을 받는 건 억울하다는 뜻으로 들린다. 하지만 계엄 당일 오찬에서 김 전 장관이 “탱크로 국회를 밀어버리겠다”고 했다는데 실제로 그날 밤 탱크부대장이 판교 정보사에 대기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겸임하는 현직 대법관에 대한 구두 체포 지시, 야당 대표에게 1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부장판사에 대한 위치 확보 시도도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설마 했던 ‘북풍 공작’ 의혹을 뒷받침하는 물증까지 나왔다. 윤 대통령이 야당을 두고 언급한 ‘광란의 칼춤’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무능해서 실패했기 망정이지 어쩔 뻔했나. ▷‘6시간 계엄’에 놀란 가슴이 가라앉기도 전에 이처럼 경악할 만한 속보들이 쏟아지고 있다. 5100만 국민이 두고두고 할부로 치러야 할 안보와 경제적 대가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조차 안 된다. 탄핵 심판이든 내란 우두머리 수사든 부르는 대로 나가도 모자랄 판에 “엄연한 대통령”이라며 탄핵과 수사 순서를 정하고 있다. 그러고도 “굉장히 답답하다”고 한다. 사태 파악을 못 할 정도로 아둔한 건가, 비겁하게 모르는 척하는 건가. ‘대통령 복 없는 죄’밖에 없는 국민 속은 뭐라 해야 하나.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어느 정권이든 임기 후반 무렵이면 ‘게이트’가 열리곤 했다. 김현철 게이트, 최규선 게이트, 박연차 게이트, 최순실 게이트 등 게이트의 주인공은 달라도 대통령과의 친분을 악용해 부당한 잇속을 챙기다 정권에 치명타를 안기는 구조는 같았다. 윤석열 정부에선 법사와 도사들이 비리 의혹의 주역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도사와 얘기하기 좋아하는 영적인” 김건희 여사의 비선으로 지목된 이들이다. ▷대통령 부부와 친분을 과시했던 ‘건진법사’ 전성배 씨(64)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2018년 경북 영천시장 선거 출마자에게 당내 경선 승리를 위한 기도비 명목으로 1억 원을 받은 혐의다. 김 여사 전시기획사의 고문 명함을 들고 다녔고, 대통령의 입당 전 외곽 단체를 관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선 캠프 산하 조직에서 고문으로 활동하다 무속인 논란이 불거지자 조직이 해산됐으나 막후에선 역할을 했다고 한다. 법사가 이권을 챙긴다는 의혹이 정권 초기부터 나왔으나 경찰은 “풍문만으론 수사할 수 없다”고 했었다. ▷대통령 부부의 공천 개입 의혹 핵심 인물인 명태균 씨(54)도 ‘지리산 도사’로 불린다. 김 여사와는 ‘영적 대화’를 나누며 가까워졌다고 한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에 대해 김 여사에게 ‘청와대 가면 죽는다’고 조언한 사람이다. 유튜브 방송에 나와선 “김 여사가 처음 만났을 때 ‘우리 오빠 당선되느냐’고 물어봤고, ‘대선이 3월 9일이라 당선된다’고 답했다”고 했다. 이재명 후보는 꽃이 피어야 당선되는데 3월 9일이면 꽃이 피기 전이라는 것이다. ▷건진법사와 명도사는 천공과 함께 대통령 부부의 ‘3대 비선’으로 꼽히는데 이들 간 비선 경쟁도 치열했다. 명도사는 “(김영선 전 의원이) 건진법사가 공천 줬다더라. … 나를 쫓아내려고”라고 말했다. 김 전 의원이 공천받은 게 건진법사 덕분이라고 말하고 다닌다며 화낸 것이다. 또 “천공 같은 사람은 우리가 볼 때는 어린애”라고도 했다. 도사와 법사가 구속되고 체포되자 천공은 18일 윤 대통령에 대해 “지금은 실패한 게 아니다” “희생이 되더라도 국민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두둔했다. ▷검찰은 명 씨의 ‘황금폰’에 이어 전 씨의 ‘법사폰’까지 확보해 분석 중이다. 황금폰은 명 씨가 관여한 것으로 의심되는 각종 선거가 있었던 시기에 사용한 폰이고, 법사폰엔 세무조사 무마 청탁과 이권 개입 의혹을 규명할 단서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통령 부부와의 통화 녹음도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아 게이트가 열리면 계엄 못지않은 ‘험한 것’들이 튀어나올 수 있다. 전문가의 조언과 민심엔 귀 닫은 채 자신의 미래도 내다보지 못한 삿된 도인들에게 휘둘렸으니 전근대적 리더의 행로가 편할 리 없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45년 만의 비상계엄 사태는 오래된 문화를 소환했다. 대학 캠퍼스에는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서툰 손글씨의 종이 대자보가 나붙었다. 디지털 세계에 갇혀 지내던 학생들은 광장에 나와 난생처음 대자보를 쓰고 읽으며 해방감과 유대감을 느꼈다고 한다. 또 하나가 호외(號外) 신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14일 토요일은 신문사들이 쉬는 휴일이었으나 일제히 호외를 발행해 헌정 사상 3번째 대통령 탄핵안 가결 소식을 전했다. ▷호외는 정규 발행일을 기다리기엔 긴급한 뉴스를 전하기 위해 호수 없이 발행하는 신문이다. 동아일보는 3만2120호와 3만2121호 사이 ‘尹대통령 탄핵, 직무정지’라는 큰 제목의 4개면 호외를 발행했다. 호외를 받아 든 중장년층은 “오랜만에 보는 호외”라며 반가워했고, 청년들은 드라마에서 봤던 신문 배달 소년처럼 “호외요 호외”를 외치며 신기해했다. 집회 현장의 시민들은 ‘역사 굿즈(기념품)’ 호외를 들고 인증샷을 찍었고, 소셜미디어에는 “탄핵 호외 구하고 싶다”거나 “호외 2부 있어서 1부 나눔한다”는 게시글도 여럿 올라왔다. ▷한국인이 발행한 최초의 호외는 독립신문 1898년 2월 19일자다. 4일 전 미 해군 함정이 쿠바 아바나만에서 폭침당했다며 미국-스페인 전쟁의 도화선이 될 사건을 전하는 내용이었다. 외신을 호외로 보도할 정도로 안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20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되면서 호외 발행이 잦아졌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엔 두 신문이 한 달 동안 약 50회의 호외를 내며 전황 속보를 전했다. TV가 보급되기 전에는 대형 물난리가 나면 ‘화보 호외’를 찍기도 했다. ▷호외는 환희와 성취, 충격과 슬픔이 가득한 현대사의 기록이다. 4·19 혁명, 5·16 쿠데타, 박정희 대통령 피살, 6·29 선언, 월드컵 4강 진출, 남북 판문점 선언 등 제목만 일별해도 격동의 현대사임을 실감할 수 있다. 드물지만 오보를 낼 때도 있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호외를 내고 이준 열사의 할복 자결 소식을 전했는데 오보였다. 1986년엔 한 신문사가 ‘김일성 총맞아 피살’이라는 제목의 호외를 발행했으나 바로 다음 날 김일성이 평양 공항에 나타나면서 오보로 판명 났다. ▷호외 전성시대도 저물었다. 이제 속보는 방송과 인터넷, 신문은 심층 보도와 의제 설정을 담당한다. 그래도 호외 문화가 남아 있는 이유는 중대한 사건일수록 공신력 있는 매체에서 정돈된 정보를 확인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온갖 설이 난무하는 디지털 시대에 삼삼오오 모여 호외를 펼쳐 든 건 ‘역사의 초고’를 공유하며 역사의 방관자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일종의 의례였을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8년 전 탄핵 정국에선 박근혜 대통령의 정신건강과 심리 상태를 놓고 전문가들이 여러 분석을 제기한 적이 있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대통령의 언행을 설명해 보려는 시도였다. 이번에도 음모론에 빠져 실패할 게 뻔한 비상계엄 선포로 탄핵 위기를 자초한 윤석열 대통령의 ‘범행 동기’에 대해 전문가들이 갖가지 분석을 내놓고 있다. “엄정 수사와 함께 정신 감정이 필요하다”는 제안도 나왔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대면 없이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순 없다”는 전제하에 “현실이 아닌 걸 현실로 믿는 망상적 사고를 갖고 있는 것으로 우려된다”고 했다. “권력자 중엔 자기애가 지나쳐 공감력이 떨어지는 이들이 있는데 윤 대통령이 그런 상태일 수 있다” “충동 제어가 안 되는 것 같다”는 진단이 나왔다.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병리적 문제일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자기와 다른 의견이나 질문에 노출되는 데 대해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 공포를 느끼는 것 같다”는 것이다. ▷직접 진료하지 않은 공인의 정신건강에 대해 전문적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의료 윤리 위반이 될 수 있다. 한 의대 교수는 “전문가 권위를 남용하고 의료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릴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의사들에겐 개인의 병이 타인에게 심각한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 ‘경고의 의무’가 있다는 반론도 있다. 대통령의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면 국가적 재앙이 되므로 비밀 준수 규정을 지키는 게 오히려 의사 윤리 위반이라는 논리다. ▷경고의 의무는 2017년 미국 정신의학 전문가 27명이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에 대해 “극단적 쾌락주의자이자 병적 나르시시스트, 소시오패스”라고 진단하면서 주목받았다. 트럼프가 나오는 수백 시간 분량의 동영상, 수천 건의 인터뷰, 수만 건의 트윗을 분석한 결과였다. 이들은 백악관 의료진이 대통령의 정신건강도 관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핵무기 담당자는 정신건강을 별도로 관리하면서 핵단추 누르는 최고 결정권자는 왜 관리 않느냐는 지적이었다. 국내에서도 대통령 정신건강을 관리할 주치의를 두고, 최고위급 공직자와 장성급은 매년 정신 검진을 의무화하자는 제안이 나온다. ▷윤 대통령은 “조증과 울증 상태를 왔다 갔다 하는 양극성 정동장애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빈손으로 임기를 마치게 될 거라는 비관과 초고속 승진해 용산까지 왔으니 앞으로도 잘될 거라는 낙관 사이에서 ‘정신적인 붕괴 상태’에 이르렀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윤 대통령은 국민 정신건강을 위해 역대 정부 최초로 대통령 직속 정신건강 정책 혁신위원회를 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국민을 위한다면 자신의 정신건강부터 챙겨야 했다. 대통령 마음의 병은 나라의 큰 ‘유고’에 해당함을 절감하는 시국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한강(54)이 노벨 문학상 시상식을 위해 스웨덴을 찾은 영광의 주간에 작가의 고국에선 부끄러운 비상계엄 사태가 터졌다. 한강의 대표작 중 하나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소년이 온다’이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 평가받은 작품이다. 45년 전 계엄 사태에 천착해 온 작가에게 외신 기자들은 6일 기자회견에서 2024년 또다시 계엄 사태를 맞은 소감을 물었다. ▷3일 밤 사람들이 계엄의 주동자들과 이를 저지하는 국회의원들의 긴박한 움직임을 쫓는 동안 작가는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화면에서 서로 뒤엉켜버린 군경과 시민들에 주목했다. “맨손으로 무장한 군인들을 껴안으며 제지하려는 모습”에서 “진심과 용기가 느껴졌다”고 했다. 작가의 시선은 명령과 양심 사이에서 “소극적으로 움직이는” 젊은 제복들에게도 닿았다. “명령을 내린 사람 입장에서는 소극적이었겠지만 보편적 가치의 관점에서 본다면 생각하고 판단하고 고통을 느끼면서 해결책을 찾으려는 적극적인 행위였다.” ▷작가는 7일 한림원 강연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들려줬다. ‘소년이 온다’를 쓰려고 1980년 광주를 취재하며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어가던 즈음 ‘소극적으로 보이지만 적극적인 행위자’를 자료 속에서 만났다고 했다. 계엄군이 들이닥칠 줄 알면서도 광주 시민들 곁을 지키다 살해된 젊은 야학 교사도 그중 한 명인데 그는 마지막 밤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한강의 강연 주제는 ‘빛과 실’이다. 여덟 살 때 볼펜 깍지에 몽당연필을 끼워 쓴 시에서 따왔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사랑이란 무얼까?/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인간은 언어라는 실로 연결돼 있고, 그 실에 생명의 빛이 흐른다는 뜻이라고 한다. 영국 시인 존 던의 “인간은 섬이 아니다(No man is an island)”와 나란히 오래도록 기억될 ‘빛과 실’이다. 잔혹해지고 뒷걸음치려는 순간 서로 연결된 실에 각성의 전류를 흘려보내며 인류애를 지켜내자는 선언 같다. ▷한강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다는 것은 폭력의 반대편에 서겠다는 맹세”라고 한 적이 있다. 한림원 강연에선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한다’고 표현했다. 3일 밤의 ‘적극적 행위자’들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우리를 돕고 구할 것이다. ‘광주의 5월’이라는 비극, ‘서울의 밤’이라는 희극으로 되풀이되는 역사가 보여준 퇴행적 정치의 한계, 진창에서도 희망을 건져 올리는 문학의 힘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한강 주간’ ‘계엄령 주간’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불법 총기 소지와 탈세 혐의로 유죄 평결을 받은 둘째 아들을 임기 말에 사면했다.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며 “아들을 사면하지 않겠다”는 말을 여섯 번 했던 바이든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 아니었다면 소신을 꺾고 공약을 깰 용기를 냈을까. 트럼프는 탈세 전과가 있는 사돈을 사면하고 프랑스 대사 자리까지 내주었다. 바이든으로선 전 부인과 큰딸, 큰아들을 교통사고와 병으로 잃은 뒤 눈물로 키운 차남 사면쯤은 “미국인들이 이해해 주리라” 기대했을지 모른다. 무엇이든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쉬운 법이다. 금기를 깨는 일도 그렇다. 에밀 뒤르켐은 ‘성인들만 사는 곳에도 종류가 다를 뿐 범죄는 있기 마련’이라고 했다. 사회가 허용하는 행위에 대한 선을 그어놓고 처벌해야 공동체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후 사회학자들은 뒤르켐의 이론을 토대로 한 사회의 범죄율이 작은 등락은 있어도 장기간에 걸쳐 일정 수준으로 유지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 일탈 행위가 증가하면 일일이 엄벌하기보다 기준을 낮춰 일탈 행위의 총량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경향도 발견했다. 일탈이 익숙한 일상이 되면 더 이상 일탈이 아닌 것이다. 트럼프 당선인이 1호 인사로 미성년자 성매매 의혹을 받는 맷 게이츠를 법무부 장관에 지명한 이유도 후속 인사의 도덕성에 대한 기대 수준을 바닥까지 낮추기 위해서였다는 해석이 나온다. 직무 경험도 일천한 데다 성매매, 마약 복용, 선거자금 유용 의혹까지 받는 사람이 법무부 장관이 될 수 있다면 누구를 무슨 자리에 앉힌들 놀라겠나. 실제로 게이츠는 낙마했지만 백신 음모론자가 보건복지부 장관, 친러 인사가 국가정보국 국장, 성 학대 방치 의혹을 받는 사람이 교육부 장관에 지명됐다. 한국의 경우 2019년 조국 법무부 장관 인선이 ‘게이츠 모멘트’로 정치인의 후안무치 경쟁의 계기가 됐다고 본다. 자녀 입시비리 의혹에 사퇴하면서도 “지치지 않고 싸우겠다”며 정치적 피해자임을 강변한 그가 없었다면, 위안부 할머니 후원금 횡령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도 의원 임기 다 채운 윤미향도, 울산시장 선거 개입으로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도 “불의한 검찰 권력과 싸웠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해하며 당을 바꿔 연임한 황운하 의원도, 돈봉투 의혹으로 구속되면서 “조작 수사 중단하라” 큰소리친 송영길도 없었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역시 도덕성 면에선 ‘막하막하’의 경쟁을 하는 사이다.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인 김경동 서울대 명예교수 연구팀은 정치인의 도덕성 결핍이 나라를 위태롭게 할 지경임을 한탄하며 동서양의 고전과 고위 공직자 인사 검증 항목을 검토하고 전직 국회의원과 일반 시민 등의 의견을 수렴해 도덕성 평가 항목 6가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2022년 대선 직전 성인 남녀 1000명에게 유력 대선 후보였던 윤 대통령과 이 대표의 도덕성 점수를 매기게 했는데 윤 대통령이 100점 만점에 평균 58점, 이 대표가 53점으로 둘 다 낙제점을 받았다. 2년 반이 지난 지금 다시 평가하면 어떤 점수가 나올까. 윤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높은 점수를 받았던 항목이 ‘뇌물, 청탁, 특혜나 부당한 정치자금을 받지 않는다’와 ‘직무상 비밀을 이용해 재물을 취득하지 않는다’였다.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의혹,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봐주기 수사 의혹, 김 여사와 윤 대통령의 공천 개입 의혹이 제기된 지금도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까. 이 대표가 6개 항목 중 유일하게 윤 대통령을 앞선 평가 항목이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 노력한다’였다. ‘헌법을 수호하고 법률을 준수한다’는 항목도 다른 항목보다는 점수가 높았다. 자기를 수사한 검사는 탄핵하고, 자기를 변호한 변호사들은 국회의원 배지 달아주고, 자신의 사법 리스크에 대비해 방탄 입법까지 마다하지 않는 이 대표에게 지금은 어떤 점수를 줄까. 보수는 유능하고 진보는 도덕적이라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보수가 유능하다는 신화는 박근혜 정부, 진보가 도덕적이란 믿음은 문재인 정부를 겪으며 깨졌다. 권력을 사유화하고도 당당한 이 대표와 윤 대통령의 일탈 경쟁을 보면 진보와 보수 가릴 것 없이 도덕성이 추락할 대로 추락했음을 절감한다. ‘그래도 일은 잘하지 않느냐’는 말을 어느 쪽도 꺼낼 수 없이 되는 일 하나 없는 꽉 막힌 정국이다. 정치의 위기가 아니라 도덕성의 위기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정치를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덤덤하게 봐 내는 도덕 불감증으론 극복할 수 없는 위기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권력자 주변에선 아부 경쟁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미국 백악관에도 ‘아부의 드림팀’이 있다고 한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즉흥적이고 위험한 제안을 할 때면 참모들은 “대통령님 본능은 언제나 옳다”고 맞장구쳤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재미 없는 농담에 가장 큰 소리로 제일 마지막까지 웃은 사람은 앨 고어 당시 부통령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참모들도 백악관 드림팀 못지않다. 민망한 아부를 밖에서 다 듣도록 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김용현 국방부 장관은 28일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대통령이 휴가 기간에 골프를 쳤느냐는 질문에 “8월 8, 9일 구룡대(계룡대 내 골프장)에서 운동한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8월 24일 이전엔 친 적 없다’는 대통령실 해명을 뒤집은 것이다. 김 장관은 당시 경호처장으로 대통령 휴가 일정을 직접 챙겨놓고도 골프 라운딩에 대해선 “모른다”로 일관해 왔다. 그간의 거짓 해명에 대해 사과해야 했지만 김 장관은 ‘휴가 기간에 장병들을 위해 함께 운동한 게 비난받을 일이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부사관 한 분은 ‘대통령님하고 라운딩할 줄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로또에 당첨된 기분’이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국민에게 머리 숙여야 하는 타이밍에 충성 발언으로 대통령 욕보이는 참모들이 있다. 홍철호 정무수석은 대통령의 최근 기자회견에서 ‘무엇에 대해 사과하는지 명확히 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이 “무례”라고 했다가 “대통령이 왕이냐”는 비난을 샀다. 정진석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에 대해 “유럽도 20% 넘기는 정상들이 많지 않다”고 했다가 “정신승리 오지다”는 비아냥거림을 들었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입시에 대해서는 (대통령께) 제가 많이 배운다”는 발언으로 ‘킬러 문항 배제’ 후폭풍을 키운 적이 있다. ▷사람은 아부에 약하다. 못난 사람은 아부를 들으면 ‘남이 비위를 맞춰줄 정도로 난 중요한 사람’이라며 우쭐하고, 잘난 사람은 ‘아부하는 사람 안목이 뛰어나다’고 착각한다. 아부가 오글거릴수록 보상은 커진다. 제 평판 망치면서까지 내 편 들어주니 얼마나 고맙겠나. 다들 ‘디올백’이라 할 때 혼자 “쪼만한 백”이라 했다가 기자 30년 인생 부정당하고 KBS 사장 자리에 오른 이가 대표적 사례다. ▷아부엔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선의의 아부도 있다. 대통령과 골프 라운딩을 한 부사관은 감사의 뜻에서 “로또에 당첨된 기분”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선의의 아부를 맥락이 다른 곳에 인용하면서 악의의 아부로 만들어 버렸다. 현명한 리더는 중요한 일을 맡길 사람, 같이 술 마실 사람을 가려 쓴다. 귀에 다디단 악의의 아부꾼을 술 마실 때도, 중요한 일 할 때도 쓰는 데서 리더와 조직의 위기가 온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970년대생은 산전수전 다 겪은 세대다. 10대엔 고도성장기 풍요를 만끽한 X세대, 20대엔 외환위기와 닷컴 버블 붕괴로 취업난을 겪은 IMF세대였다. 직장에선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선배와 그런 선배를 꼰대라 부르는 MZ세대 사이에 낀 세대다. 중년에 접어든 후로는 생애 주기상 돌봄 부담의 정점에서 부모와 자녀를 동시에 부양하느라 허리가 두 번 휘는 세대라고 한다. ▷원래 돌봄 부담이 큰 세대로는 60년대생이 꼽힌다.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녀에게 부양받지 못하는 ‘처’음 세대라는 뜻에서 ‘마처세대’라 불린다. 그런데 마처세대보다 돌봄과 노후 불안이 큰 세대가 70년대생이다. 재단법인 ‘돌봄과 미래’가 최근 60년대생과 70년대생(70∼74년생) 150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70년대생이 노후 준비는 덜 돼 있는 반면 부모와 자녀를 이중 부양하는 비율은 25%로 60년대생보다 10%나 높았다. 이중 부양자의 월평균 지출액은 60년대생이 164만 원, 70년대생은 155만 원이었다. ▷70년대생은 특히 자녀 부양 부담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60년대생은 자녀가 평균 2명, 70년대생은 1.8명인데 월평균 지출 규모는 70년대생이 107만 원으로 60년대생(88만 원)보다 컸다. 아직 자녀 교육이 덜 끝난 탓도 있겠지만 남다른 교육열도 부담을 키우는 요인이다. 70년대생이 취업할 무렵 경제는 저성장기에 접어들고 기회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안정된 직장을 위한 스펙의 중요성을 절감한 70년대생은 적게 낳아 투자를 몰아주는 저출산 1세대 부모가 됐다. 취업 연령이 갈수록 늦어지는 세태도 부양 부담을 키우고 있다. ▷한국인의 노동 소득은 43세 무렵 정점을 찍는다. 수입이 줄어들기 시작하는 시기에 노부모 생활비 병원비와 자녀 학비까지 대야 하니 자기 몸을 돌보거나 노후 준비할 여유가 없다. 앞선 설문조사에서 70년대생의 주관적 기대수명은 83.3년으로 60년대생(85.6년)보다 오히려 짧았다. 70년대생은 65세가 돼야 국민연금을 받을 수 있는데 정년을 못 채울까 걱정이고, 일 그만두고 나면 연금 수령 시기까지 ‘소득 크레바스’를 어찌 견딜까 걱정이라고 한다. ▷해외의 경우 삶의 만족도는 나이 들수록 떨어지다 중년에 바닥을 찍고 올라간다. 그런데 한국은 30, 40대에 정점을 찍은 후 계속 내리막이다. 노년의 곤궁함과 무관하지 않다. 70년대생은 그나마 자산 축적 속도가 빨라 부모 세대 수준으로 따라잡은 세대다(서울연구원 자료). 자산 형성은 어려운데 고령화와 만혼으로 은퇴 세대 연금과 자녀를 책임져야 하는 기간이 길어진다면 ‘70년대생이 우리보단 나았다’는 80년대생이 나올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최고 권력자라고 휴대전화 욕심이 없을 리 없다.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개인 폰을 휴대한 버락 오바마는 블랙베리 마니아였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당시 아이폰 3대를 썼는데 이 중 하나는 보안 칩을 넣지 않은 개인용이었다.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는 약 100명의 전화번호가 저장된 개인 폰을 휴대했고, 프랑수아 올랑드 전 프랑스 대통령은 개인 폰으로 여친과 문자를 주고받았다. KGB 출신으로 보안 의식이 철저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휴대전화를 멀리한 거의 유일한 예외다. ▷윤석열 대통령도 도감청 방지 기능이 있는 보안폰과 별도로 검사 시절 쓰던 개인 휴대전화를 계속 이용해 왔는데 최근 김건희 여사와 함께 기존에 쓰던 개인 휴대전화와 번호를 교체했다고 한다. 김 여사가 명태균 씨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 “제가 명 선생님께 완전 의지하는 상황” “철없이 떠드는 우리 오빠 용서해주세요” 등이 공개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윤 대통령은 7일 기자회견에서 김 여사가 개인 폰으로 외부와 소통하며 국정에 개입해 왔다는 의혹에 대해 “저도, 제 처도 휴대폰을 바꿨어야 한다”고 했다. ▷대통령이 개인 폰을 쓰면 보안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윤 대통령은 채 상병 사망사건 수사 외압 의혹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개인 폰으로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에게 3차례 전화를 건 사실이 드러났는데 그때도 수사 외압과는 별개로 보안 문제가 제기됐다.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 폰은 중국에, 메르켈 총리 폰은 미국에 도청당한 전례도 있다. 오바마 대통령의 블랙베리는 전화를 걸 수도 문자를 보낼 수도 없고, 그저 걸려 오는 전화를 받고 극소수 사람들이 보내는 이메일만 수신할 수 있는 ‘세 살짜리 애들이 갖고 노는 수준’이었다. ▷개인 휴대전화를 교체한 정도로 윤 대통령이 언급한 ‘리스크’를 줄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번호를 바꿔도 기존 연락처는 다 남아 있다. 새 휴대전화로 계속 문자 주고받고 통화하면 바꾸나 마나 아닌가. 개인 휴대전화가 없어도 마음만 먹으면 내밀한 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특검 수사 과정에서 당시 청와대 행정관의 차명폰으로 40년 지기 최순실 씨와 570여 차례 통화한 사실이 드러났다. ▷대통령 부부의 개인 휴대전화 교체는 국정 쇄신을 약속한 후 처음 나온 가시적 조치다. “인재 풀 물색과 검증에 들어갔다”던 인적 쇄신은 “상당한 물리적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여사 라인’은 건재하고, 제2부속실 설치와 특별감찰관 임명도 속도를 못 내고 있다. 개인 폰 교체에 대해 “유일한 국정 쇄신” “증거 인멸”이라는 비아냥거림이 나온다. 휴대전화가 아니라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주요 공약 중 하나가 연방 교육부 폐지다. 그는 “미국 학생들은 막대한 교육비를 쓰고도 전 세계 또래들보다 뒤처지고 있다”고 했다. 또 “교육부가 여러분 자녀들에게 허튼 훈계를 늘어놓는 데 세금을 낭비하고 있다”며 “연방 교육부를 없애버리겠다”고 했다. 이는 그가 2016년 대선 때도 공약했으나 실행하지 못한 정책이다. ▷트럼프는 연방 교육부를 폐지하고 그 권한을 주 정부에 돌려주겠다고 했는데 미국 교육은 헌법상 주 정부 권한이고 실제로도 주 정부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신입생 선발과 교육과정 운영, 학교 설립 인허가권은 주 정부에 있고 연방 교육부는 학자금 지원 같은 제한된 업무만 한다. 1957년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을 발사하자 충격을 받고 수학 과학 교육에 연방 예산을 지원하기 시작했지만 학교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도 안 된다. 교육부를 폐지하든 않든 학교 현장에 주는 영향은 크지 않은 셈이다. ▷연방 교육부 폐지는 1980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처음 시도했다. 교육부는 1979년 지미 카터 대통령이 보건교육복지부에서 교육을 떼어내 13번째 부로 신설했는데 주 정부 권한을 침해하는 데다 대선 당시 교원단체의 지지에 대한 답례 성격이어서 집권 민주당에서도 반대가 나왔다. 레이건이 집권하자마자 폐지를 시도했으나 뜻밖에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교육부 관료, 의회 교육위원회, 교육 단체들이 ‘철의 삼각(iron triangle)’ 동맹을 맺고 막았다. 연방 교육부의 지원금 정책은 양당 의원들이 모두 좋아해 이번에도 교육부 폐지안이 의회 표결을 통과하긴 쉽지 않아 보인다. ▷미국 교육 정책은 양당이 크게 다르지 않다. 민주당 빌 클린턴 정부가 공화당의 성과 위주 정책을 채택한 이후 학교 선택권 보장과 학업 성취도에 따른 학교 책임 강화 기조가 초당적으로 유지돼 왔다. 트럼프의 교육부 공약은 교육 정책이라기보다 문화 전쟁에 가깝다. 현 정부의 성 소수자 보호 정책에 대해 보수적인 유권자들은 “학교를 타락시키고 있다”며 반발하는데 교육부 폐지도 이런 표심을 의식한 정치적 수사라는 분석이다. ▷국내에서도 “교육부가 없어야 교육이 산다”는 말이 나온 지 오래다. 한국 교육부는 막강한 권한으로 교실 크기부터 강사 수업 시수까지 시시콜콜 간섭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런 교육부는 폐지해야 한다”고 했고, 이주호 장관도 입각 전엔 “대학을 교육부 산하에서 떼어내야 한다”고 했다. 교육부 말고도 17개 시도교육청에 국가교육위원회까지 있는데 누구 하나 개혁다운 개혁 과제를 챙기지 않고, 문제가 생기면 서로 책임만 떠넘긴다. 교육부 폐지 논의가 어느 곳보다 필요한 나라가 한국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미국 연방 상원의원은 “한 명 한 명이 대선 후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위상이 높다. 주별로 2명씩 총 100명으로 하원의원(435명)보다 숫자는 적은 반면 임기는 3배인 6년이다. 이 중 백인이 80여 명, 아시아계는 현재 일본계(하와이)와 태국계(일리노이) 여성 의원 2명이 있다. 5일 한국계 앤디 김 민주당 하원의원(42)이 당선되면서 아시아계가 3명으로 늘었다. 아시아계로는 동부지역 최초 상원의원이고, 120여 년 한국 재미교포 역사상 첫 상원의원이다. ▷이민 2세대인 앤디 김은 외교 분야 전문가다. 시카고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미 국무부에서 이라크 전문가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고, 버락 오바마 정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을 지냈다. 2018년 뉴저지주 제3선거구에서 공화당 현역 의원을 꺾고 첫 아시아계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후 내리 3선을 했다. 하원의원으로서 78만 지역구 주민을 대표하던 그는 이제 상원의원으로서 900만 뉴저지 주민을 대표하게 됐다. ▷뉴저지주는 민주당이 52년간 줄곧 상원의원을 배출한 민주당 텃밭으로 당내 경선이 더 치열했다. 뉴저지주 토박이인 그는 “우리 가족에게 기회를 준 뉴저지와 미국을 위해 일하게 해달라”고 호소하는 한편 기득권에 도전하며 새바람을 일으켰다. 지역 정치권이 지지하는 후보 이름을 투표용지의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배치하는 관행을 소송으로 바로잡고, 경쟁자인 뉴저지 주지사 부인을 ‘남편 찬스’ 논란으로 주저앉혔다. 그는 취임하면 세 번째로 젊은 상원의원이 된다. ▷선거 유세에선 “분열된 나라를 치유하겠다”고 했는데 현지 언론은 “냉소적인 유권자조차 그 말을 믿었다”고 전했다. 2021년 1월 대선 결과에 불복하는 폭도들로 난장판이 된 연방의회 건물에서 혼자 쓰레기를 치우는 모습이 깊은 인상을 남긴 덕이다. 공화당 후보 커티스 바쇼(64)와는 품위 있는 경쟁으로 박수를 받았다. 바쇼 후보가 TV토론 도중 식은땀을 흘리며 비틀거리자 그가 바로 달려가 부축했다. 우파 팟캐스트 진행자가 앤디 김의 인종 문제를 제기했을 땐 바쇼 후보가 제지했다. “앤디 김은 평생을 공공에 헌신한 애국적 미국인이다.” ▷소아마비 환자로 한국 보육원에서 자란 그의 부친은 국비 장학생이 돼 매사추세츠공대와 하버드대에서 유학하고 암과 알츠하이머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그의 어머니는 간호사, 누나는 역사학자로 매디슨 위스콘신대 교수다. 앤디 김은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적극 관여하도록 돕고 싶다면서도 “한국계뿐만 아니라 미국인을 대표하는 리더가 되겠다”고 했다. 이민자 가족의 대를 잇는 성공 스토리는 대선 한 번 치르려면 감시 드론 띄우고 저격수 배치해야 할 정도로 불안해진 미국의 미래를 낙관하게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제왕적 대통령의 측근들은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대통령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하는 황태자(crown prince), 대통령과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실세 측근들(acolytes), 대통령과 사적 인연이 깊은 가신 측근들(retainers), 그리고 궁정 광대(court clown)다.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국가정보원 차장, 주영 대사와 주일 대사를 두루 역임한 정치학자 라종일 박사가 왕정 시대 용어로 소개한 유형화다. 현실에서는 한 인물이 두 개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윤석열 정부의 황태자는 김건희 여사다. 대통령실과 여당의 ‘찐윤’이 실세 측근, 공식 직함 없이 대통령 부부와 사적 인연으로 입길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가신 측근들이다. 현대인들에겐 생소한 유형이 궁정 광대인데, 올 9월 한 언론의 단독 보도로 갑자기 등장해 연일 놀라운 이야기를 쏟아내는 정치 브로커 명태균 씨가 궁정 광대에 가깝다. 궁정 광대는 남다른 재주와 친화력으로 왕의 압박감을 덜어주고 말 못할 고민을 들어주는 인물이다. 점잖고 잃을 것 많은 권세가들은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하는 막말로 왕이든 누구든 금기 없이 조롱하는 특권을 지닌 사람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 희곡에는 광대가 자주 등장한다. ‘리어왕’의 광대는 가짜 효심을 내세운 딸들에게 속아 나라 땅을 나눠주고 버림받은 리어왕에게 “지혜로운 자가 멍청이가 되어 하는 짓이 숙맥 같구나” 한다. 명태균과 그의 측근이었던 인물이 폭로하는 용산 이야기를 한 편의 희곡이라 생각하면 명태균의 역할은 분명해진다. 그는 대선 당시 윤 대통령 집을 수시로 드나들었다고 한다. 김 여사가 ‘어젯밤 꿈에 남편이 젊은 여자와 어딜 떠나는’ 같은 민망한 이야기도 털어놓는 상대였다. 대통령은 ‘장님 무사’, 김 여사는 ‘앉은뱅이 주술사’라 했고, 대통령에게 5년을 버틸 내공이 없으니 ‘젖은 연탄’ 보수의 ‘번개탄’ 역할만 2년 하고 내려오라 했단다. “오빠, 대통령으로 자격 있는 거야?” 하고 김 여사 흉내도 냈다. 대통령 탓에 총선에서 참패하고도 총선 백서에 감히 ‘대통령 탓’이라 쓰지 못하는 여당이다. 금기를 깨고 무례를 범하는 건 광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광대가 광대만의 특권을 누리는 이유는 그가 국정에 힘이 되는 존재여서다. 외로운 왕에게 위안을 주고, 때론 직언으로 세상 이치와 민심도 전한다. 왕은 속으로 뜨끔 하면서도 “고놈 입버릇 참 고약하구나” 하고 만다. 어차피 광대가 하는 말이다. 첨예한 갈등이 벌어지는 권력 중심부에서 특유의 흰소리로 긴장을 해소하거나, 권력에 대한 조롱과 풍자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흉흉한 민심이 임계점을 넘지 않도록 압력을 빼주는 역할도 한다. 하지만 명태균의 광대 짓은 불길하다. 그를 매개로 대통령 부부가 공천에 개입했다거나 공천 거래를 했다는 법적인 의혹 탓만은 아니다. 대통령은 광대의 무례를 대범하게 웃어 넘기지 못하고 그의 조롱에 쩔쩔매는 듯하다. 명태균의 존재가 알려지자 대통령실은 “명 씨와 2번 만났다”고 했는데 곧 여러 번 만난 사실이 들통났다. “당내 경선 막바지 이후 관계를 끊었다” 했으나 취임식 전날 통화하는 대통령 육성이 나왔다. 김 여사와의 카카오톡 문자 대화에서 ‘철없이 떠드는 우리 오빠’가 공개된 후론 대통령과 무관한 ‘배 나온 오빠’란 표현에 당내에서 발작적으로 정색하는 소동도 벌어졌다. 광대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어도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존재다. 광대의 말은 누구도 곧이듣지 않기 때문이다. 광대가 내로라하는 책사들을 제치고 “이 정권 창출엔 내가 일등공신”이라 하면 누가 믿겠나. 그런데 명태균은 어떤가. 그가 ‘꿈자리가 사납다’고 해서 대통령이 해외 순방 출국 일정을 바꾸었다고 한다. 대통령 부부를 앉혀 놓고 초대 총리로 아무개를 임명하라고 했단다. 이런 황당한 얘기가 그럴듯하게 들린다면 정권이 위기라는 뜻 아닌가. 대통령실은 명태균 의혹에 ‘법적으로 문제될 것 없다’고 했다. 법적 책임보다 더 심각한 건 명태균 의혹이 용산의 권위를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마천의 ‘사기-골계열전’에는 세 가지 리더십 유형이 나온다. 유능해 속일 수 없는(不能欺) 지장(智將), 존경스러워 차마 속일 수 없는(不忍欺) 덕장(德將), 감히 속일 엄두를 못 내게 하는(不敢欺) 용장(勇將)이다. 유능하지도 않고, 존경받지도 못하면서, 위엄도 없다면 무엇으로 국정을 이끌어갈 수 있을까.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전원일기’는 1980년부터 2002년까지 방영된 최장수 드라마다. 요즘도 케이블 채널에선 전원일기를 방영하는데 양촌리 김 회장 댁 최불암(84) 김혜자(83)부터 큰아들 김용건(78) 고두심(73) 내외와 둘째 아들 유인촌(73)까지 톱스타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이들 중 ‘일용 엄니’ 김수미가 25일 먼저 세상을 떠났다. 향년 75세. 전원일기의 추억이 생생한 이들에겐 ‘일용이 모친상’ 같다. ▷김수미가 일용 엄니를 맡았을 때가 일용이 박은수보다 두 살 어린 31세였다. 요즘 잘나가는 김고은(33) 박은빈(32)보다 어린 나이다. 젊은 배우에게 노역을 맡기는 건 모험이었다. 그런데 방송 첫날부터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인물은 이 하나 빠진 감초역 일용 엄니였다. 일찍 홀몸이 돼 일용이 키우며 김 회장네 덕을 보고 살면서도 때론 용심을 품는 인간적인 조연으로 국민 배우가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맞는 일용 엄니 명대사가 있다. “인생사는 계산이 안 맞는겨.” ▷전북 군산에서 김영옥으로 태어나 1970년 MBC 공채 3기 탤런트로 데뷔했다. “동기생 김영애 못지않게 외모에 자신 있었는데 이상한 배역만 들어왔다”고 한다. “연기로 승부 보겠다”고 마음먹었고 드라마 ‘아다다’의 앙칼진 첩실, ‘새아씨’의 몸종 화순이 등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으로 연기상을 휩쓸었다. 머리가 희끗해질 무렵엔 ‘센 캐릭터’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영화 ‘마파도’의 욕쟁이 할매, ‘가문’ 시리즈 홍덕자 여사, 드라마 ‘전설의 마녀’의 일자무식 재소자가 그렇다. 배우로서 독보적 영역을 개척한 그는 “돌멩이도 모양이 다 다른데, 배우들도 다 달라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입담 좋은 예능 스타로 최근까지 웃음을 선사했고, 요리 예능에선 남다른 손맛도 뽐냈다. 드라마 촬영 땐 대형 전기밥솥에 직접 만들고 담근 반찬과 김치를 싸들고 가 스태프 수십 명을 밥해 먹이는 후한 인심으로 유명하다. 고인의 어머니가 없는 살림에도 보따리장수들까지 밥 먹여 보내는 분이어서 “어머니가 지은 복으로 내가 잘산다”고 했다. 친자매 같았던 김혜자에겐 이런 말을 했단다. “혜자 언닌 김치 담글 줄도 모르면서, 내가 밥하고 반찬 해다 주면 먹기만 하면서 왜 국민 엄마야.” ▷“내 얼굴 보면 상욕하고 곗돈 챙길 사람 같지만 사실은 책 좋아하고 꽃만 보면 환장한다.” 에세이집을 포함해 8권의 책을 썼고, 3년 전 써둔 유서시 제목은 어머니가 생전 애지중지 키웠던 ‘나팔꽃’이다. “난 울 엄니 만나러 가요. … 꽃피는 봄도 일흔 번 넘게 봤고 함박눈도 일흔 번이나 봤죠. … 누군가 내 잔디 이불 위에 나팔꽃씨 뿌려주신다면 가을엔 살포시 눈을 떠 보랏빛 나팔꽃을 볼게요. 잘 놀다 가요. 굳바이 굳바이.”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코코네 그룹이 다음달 7일과 28일 글로벌 히트 서비스 ‘리블리 아일랜드’와 ‘포켓트윈’ 한국어 버전을 내놓는다.코코네 그룹은 한국 IT 기업인 천양현 회장이 2008년 일본에 설립한 후 ‘포케코로’, ‘헬로 스윗 데이즈(한국 서비스명 헬로키티 스윗파티)’ 등 아바타를 이용한 소셜 서비스 앱 부문에서 일본을 석권해왔다. ‘리블리 아일랜드’는 연금술에서 태어난 생명체 리블리를 키우는 서비스앱으로 2021년 출시 후 현재까지 1000만 다운로드를 앞둔 히트작. 10대에서 성인까지 즐길 수 있다. ‘포켓트윈’은 10대를 위한 롤 플레이 서비스로 1600만 다운로드를 눈 앞에 두고 있다. ‘리블리 아일랜드’는 10월 28일, ‘포켓트윈’은 11월14일부터 홈페이지와 앱스토어를 통해 사전 예약을 하며, 사전 예약에 참여하는 이용자들에게는 특별 아이템 제공을 포함한 다양한 혜택이 주어진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KBS 박장범 앵커(54)는 ‘파우치 앵커’ 혹은 ‘쪼만한 백’으로 불린다. 올 2월 윤석열 대통령과의 단독 대담 방송에서 디올백 사태에 대해 “이른바 파우치, 외국 회사 그 뭐 쪼만한 백이죠”라고 말해 사안을 축소하려 했다는 비난을 받은 뒤부터다. ‘파우치 앵커’는 23일 KBS 이사회에서 신임 사장 후보로 선임됐는데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면 기자로 입사한 지 30년 만에 12월 임기 3년의 사장 자리에 오른다. ▷처음엔 박민 현 사장이 유임될 것으로 점쳐졌다. 윤 대통령이 임명한 첫 공영방송 수장으로 어렵게 국회 인사청문회까지 거친 박 사장이 전임자의 잔여 임기 1년 1개월만 채우고 그만둘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박 사장이 취임 첫날 발탁한 ‘뉴스9’ 앵커가 박 사장을 제치고 최종 후보가 됐다. 24일 국감에서 야당 의원은 “대통령의 술친구 박민 사장이 김 여사 머슴을 자처한 박장범에게 밀린 것”이라고 했다. ▷KBS 이사회 면접에서도 디올백 질문이 나왔다. 박 후보자는 “사치품을 명품이라 부르는 것은 부적절” “제조사에서 붙인 이름(파우치)을 쓰는 것이 원칙” “파우치는 한국말로 ‘작은 가방’”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당시 대담을 떠올려보면 궁색한 변명 같다. 박 후보자는 ‘명품백 수수 논란’이라 하지 않고 “방문자가 김건희 여사를 만나서 앞에 놓고 가는”이라고 했다. 대통령이 4월 총선 최대 악재인 명품백에 대해 처음 공식 입장을 밝히는 자리였지만 질문이 뭉툭해서인지 대통령은 사과하지 않았다. 18개월간 공식 회견을 거부하던 대통령의 녹화 대담을, 그것도 녹화 3일 후 내보내는 방식을 수용한 것 자체가 공영방송의 흑역사로 남을 일이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KBS 이사회가 임명 제청권을 행사하면서 이른바 ‘민선 사장’ 시대가 열렸다. 한동안 명망가들이 사장에 임명돼 공영방송으로서 제자리를 잡아가나 싶었지만 2000년대 초중반부터 정치색 짙은 인물이 사장이 돼 정권 바뀔 때마다 새 사장이 전임자 시절 ‘용비어천가’를 반성하는 게 관례가 됐다. 박 사장도 첫 공식 행보로 대국민 사과를 했는데 그 후로도 KBS 시청자위원회에서 ‘뉴스9가 땡윤뉴스라는 조롱을 많이 받는다’는 지적이 나왔다. ▷사장 선임 표결을 거부한 KBS 야권 추천 이사들은 “박 후보자 선출은 원천 무효”라며 소송을 예고했다. 표결에 참여한 여권 추천 이사들이 최근 위법 판결을 받은 방송통신위원회 ‘2인 체제’ 의결로 임명됐으니 이사들 임명부터 무효라는 주장이다. 소송에서 이기고 인사청문회 마치고 사장이 돼도 웬만한 공적을 남기지 않으면 그저 ‘쪼만한 백’ 덕에 큰 감투 쓴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어르신들은 못마땅해하지만 요즘 아내들이 남편을 부를 때 가장 많이 쓰는 호칭이 ‘오빠’다. 연애 시절부터 쓰던 말이 입에 붙은 것이다. 남편은 대부분 ‘○○야’ 하고 이름을 부른다고 한다. 서로를 ‘여보’라고 부르는 부부는 의외로 많지 않다. 재혼하는 남성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호칭도 ‘오빠’다. 그런데 국민의힘 김혜란 대변인(48)이 소셜미디어에서 남편을 ‘오빠’라고 했다가 일부 당원들의 문자 폭탄과 대변인직 사퇴 요구를 받고 있다. 대통령 부부를 조롱했다는 주장이다.▷‘오빠’ 논란의 발단은 지난달 결혼 20주년을 맞은 김 대변인이 최근 페이스북에 결혼식 가족사진과 함께 올린 게시글이다. “오빠, 20주년 선물로 선거운동 죽도록 시키고 실망시켜서 미안해…. (이때 오빠는 우리 집에서 20년째 뒹굴거리는 배 나온 오빠입니다)”. 춘천지법 원주지원 판사 출신인 김 대변인은 지난 4·10총선에서 국민의힘 강원 춘천-철원-화천-양구갑 후보로 나왔다가 떨어졌다.▷그런데 이 게시물에 ‘그 오빠가 누구냐’고 따지는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김건희 여사 공천 개입 의혹의 핵심 인물인 명태균 씨가 김 여사에게 받았다고 공개한 카카오톡 문자 “철없이 떠드는 우리 오빠”를 비꼰 것 아니냐는 의혹 제기였다. 결혼기념일이 한참 지난 시점에 ‘오빠’ 게시글을 올린 것도 의혹을 키웠다. ‘배 나온 오빠’는 대통령 부부에 대한 “명백히 의도적인 조롱” “피아 구분 못 하는 내부 총질”이라는 비난에 “피해망상일 뿐” “배 나온 오빠는 집집마다 있다” “영부인 아니면 오빠란 단어도 못 쓰나”라는 반박 글도 쇄도 중이다.▷오빠 논란은 ‘친윤’과 ‘친한’의 대결로 흐르는 양상이다. 김 대변인은 황우여 비대위원장 시절 임명된 후 유임돼 친한으로 분류된다. 그는 “제 개인정보를 악의적으로 유출하고 집단적인 사이버 테러를 한 정황이 드러났다”며 “문명사회가 묵과할 수 없는 중대 범죄 행위”라고 했다. 그의 대변인직 사퇴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진 강명구 의원(47)은 대통령실 국정기획비서관, “엄중한 시기에 저런 글을 올리는 ‘국민의힘 대변인’의 부박함”이라 비판한 여명 보좌관(33·강승규 의원실)은 대통령실 정무수석 행정관 출신이다.▷오빠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도 ‘oppa’로 올라 있는 단어다. 혈육 관계가 아닌 남자에게 ‘오빠’라 했다간 징역 2년형에 처하는 북한 말고 이 단어에 이토록 과잉 반응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원래 내부 싸움이 더 잔인한 법이라지만 집권당이 어쩌다 ‘오빠’ 소리에 둘로 쪼개져 문자 폭탄으로 치고받는 지경이 된 건가. 문제의 ‘오빠’에 대해 ‘친오빠는 논할 상대가 아니다’ ‘친오빠 맞다’며 온 국민을 농락하는 명 씨에겐 큰소리도 못 치면서 말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전공의 복귀 문제로 갈등하던 정부와 의료계가 의대생의 휴학 승인을 놓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서울대 의대가 의대 중 처음으로 휴학을 일괄 승인하자 교육부가 서울대를 감사하는 등 ‘휴학 도미노’를 막기 위해 단속에 나섰다. 교육부 차관이 4일 의대를 둔 40개 대학 총장을 온라인으로 소집해 “휴학 승인 시 현장 점검”을 압박한 데 이어 11일엔 교육부 장관이 총장들에게 “내년 복귀를 조건으로 휴학을 승인하라”며 학칙 개정을 요구했다.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 이종태 이사장은 “정부가 학생들의 미복귀에 대비한 대책은 세우지 않고 재정 지원을 끊겠다고 겁박하며 무조건 휴학을 막으라고 한다. 교육 정상화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휴학 승인”이라고 했다. 이대로 내년이 되면 휴학생과 증원된 신입생들까지 7500명이 한꺼번에 길게는 11년간 교육과 수련을 받아야 한다. 의료계에선 제대로 배우지 못한 ‘윤석열 세대’ 의사들의 등장을 우려하고 있다.》―교육부는 학생들이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몰아서 수업을 받고 유급을 면할 수 있다고 한다. “의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강 없이 꽉 짜인 시간표대로 수업한다. 2배속 3배속으로 몰아서 배우는 건 불가능하다. 의학은 연계성이 중요해 기초과학을 배우고 그것을 토대로 임상의학을 배운다. 어느 것 하나 빼먹을 수도 순서를 바꿀 수도 없다. 내년 수업 대책을 세우려면 일단 휴학을 승인해야 한다. 이런저런 조건을 달면 학생들이 교수들과 만나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교육부는 ‘국민 건강과 직결돼 있어 의대생들에겐 휴학의 자유가 없다’고 했다. “휴학원을 제출한 학생들과의 일대일 면담을 통해 자유의사인지 확인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의무교육도 아닌 대학생 휴학을 무슨 수로 막나. 교육부가 수시로 학칙 개정을 요구하며 헌법이 보장하는 대학의 자율성조차 훼손하고 있다. 국립대 사립대 모두 정부 재정 지원 사업에 묶여 있어 의대 사정을 들어주려다 다른 단과대까지 피해를 볼까 전전긍긍이다.” ―최근 국정감사에서 “의대를 5년제로 변경하는 방안에 대해 대학 의견을 수렴했느냐”란 질문에 이주호 교육부 장관이 “KAMC와 정례적으로 대화했다”고 밝혔다. “5년제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명확히 전달했다. 교육부와는 의대 교육 정상화를 위해 8월부터 대화해 왔다. 하지만 휴학 승인을 해달라는 협회 요구에 교육부는 기다려 달라는 말만 했다. 시간이 지나면 수시모집이 시작되고, 조금 더 있으면 수능 치고, 정시 시작되면 진짜 손 못 댈 거라고 믿는 듯하다. 이대로 가면 내년에도 전공의 의대생 모두 안 돌아온다.” ―정부는 의대 증원에 대비해 국립대 의대 교수를 3년간 1000명 늘리고, 내년도 지원 예산 4877억 원을 편성했다. 수업 준비가 제대로 되고 있나. “국립대는 교수를 뽑는 절차를 시작했지만 시설은 예산이 집행되기까지 시차가 있어 당장 필요한 수요를 맞추기 어렵다. 서남대 의대 폐교 후 전북대 의대가 한시적으로 특별편입정원 177명을 받았는데 정부가 지어준다던 건물은 편입생들이 졸업한 뒤에야 완공됐다.” ―의대 증원 인원의 60%가 사립대에 몰려 있다. 그런데 사립대에는 융자 알선 외엔 시설 투자나 교수 채용에 대한 정부 지원이 없다. “지방 사립대들은 등록금이 주요 재원이어서 대부분 재정적으로 취약하다. 의대생 교육비가 등록금의 3배가 든다고 한다. 학교 입장에서는 증원을 할수록 손해 보는 구조다. 그렇다고 등록금 재원을 의대에만 쓰면 다른 단과대들이 반발한다. 대출 받아 건물 짓고 뭘 하고 하는 게 매우 어려운 형편이다.” ―정원이 동결된 서울 지역 8개 의대도 내년 1학년은 정원의 두 배가 함께 수업을 들어야 한다. 서울대 의대는 135명이니 거의 270명이 한꺼번에…. “서울 지역 의대들은 형편이 낫기 때문에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대폭 증원된 지방 대학들은 답을 찾기 굉장히 어렵다. 앞으로는 서울 지역 의대와 지방 의대 간 격차가 더 커질 것이다. 특히 서울 지역 의대와 대폭 증원된 대학들 간의 초격차가 우려된다.” ―정부는 예과 2년간은 강의실 수업 위주여서 대형 강의실만 있으면 된다고 한다. “옛날 얘기다. 지금은 예과도 소규모 토론수업, 임상술기, 지역사회 실습, 의료인문학 교육, 프로젝트 수업 등 실습과 소규모 학습 비중이 크다.” ―정부가 대학별로 증원된 정원을 배분하면서 회의록을 남기지 않았다. 배분 기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합리적인 기준을 찾기 어렵다. 학생을 많이 뽑아놔도 지역에 환자가 없으면 졸업 후 지역에서 의사 생활을 할 수 없다. 의사가 부족한 지역을 중심으로 증원하고, 지역 의사로 남을 수 있도록 정책을 짜야 하는데 2000명이란 규모부터 정하고 마음대로 뿌려놓았다.” ―입학 정원이 10% 이상 늘어난 30개 의대를 대상으로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평원)이 평가해 내년 2월에 결과를 통보할 예정이다. 불인증 판정을 받는 의대가 나올까. “당장의 교육 여건뿐만 아니라 향후 연차별 교수 채용과 시설 확충 계획을 평가하기 때문에 1학년의 수업 공간이 마련돼 있고, 앞으로의 계획을 설득력 있게만 쓴다면 첫해는 큰 문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평가는 6년간 매년 하게 된다. 첫해는 한 학년만 증원되지만 그 다음 해엔 두 개 학년이 되고, 임상 실습에 들어가면 임상 교수와 시설 투자도 해야 한다. 해가 갈수록 어려움이 누적돼 2, 3년이 지나면 대학이 감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의평원이 엄격한 평가 인증을 예고하자 교육부가 의평원 이사회 구성이나 평가 방식에 개입하거나 의평원 지정 취소 가능성까지 거론하고 있다.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의평원은 2016년 아시아 최초로 세계의학교육연맹(WFME)에서 의대 평가인증기관으로 인정받았다. 의평원 인증을 받은 대학들은 자동적으로 WFME의 인증을 받는 셈이 된다. 의평원의 인증이 없으면 미국 같은 의료 선진국에서 수련의로 선진 의료 기술을 배우고 교류하는 게 다 막혀 버린다. 국내 의대 나와봐야 밖에선 후진국 의사 취급을 받게 된다.” ―서남대 의대처럼 평가 인증에서 탈락해 폐교될 경우 피해 학생들이 정부와 대학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지 않겠나. “정부는 전국 의대 수요 조사를 근거로 증원을 결정했다. 증원 규모에 최종 서명한 사람은 대학 총장들이다. 소송이 제기돼도 정부는 빠지고 결국 대학만 책임지게 될 것이다.” ―의정 갈등 사태가 장기화한 데는 한목소리를 내지 못한 의사 단체의 책임도 크다. “인정한다. 그런데 정부도 부처마다 딴 목소리여서 누구와 협의해야 할지 모르겠다. 복지부 장관이 유감 표명을 하고 나면 대통령실 수석이 나와 강경 발언을 한다. 총리가 ‘전제조건 없이 대화하자’고 한 다음 날 대통령실 수석은 ‘올해 증원은 못 건든다’고 했다. 교육부의 ‘의대 5년제 단축’에 대해서도 복지부 장관은 ‘사전 협의가 없었다’고 했다. 이러니 의정 간에 서로를 신뢰 못 하는 상황만 계속된다.” ―정부가 신설하는 ‘의료인력 수급추계위원회’에 의사단체들이 불참을 선언했다. 이 위원회 구성은 의사들도 요구했던 것 아닌가. “추계위가 독립성도 결정 권한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추계위가 추계하면 복지부 산하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가 정원을 정하게 돼 있다. 그동안 의사 인력 수급 추계 관련 연구가 40여 개 있었는데 정부가 발주한 연구는 의사가 부족하다 하고, 의료계가 발주한 보고서는 모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자기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의대 정원을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일본은 ‘항구 정원’ 외에 ‘임시 정원’을 두어 수요에 따라 줄이거나 늘린다. 이렇게 하면 정원을 재조정할 때마다 홍역을 치를 필요가 없다.” ―결국 전공의와 의대생들이 돌아와야 사태가 해결된다. 장상윤 대통령실 수석은 최근 토론회에서 “전공의와 의대생들이 왜 나갔는지 모르겠다”고 발언해 비난을 받았다. “의사 집단 내에서도 기득권과는 거리가 먼 전공의와 의대생들을 직역 카르텔이라며 악마화하고 모욕했다. 사직한 전공의들은 대부분 부모 반대를 무릅쓰고 흉부외과 등 필수 의료를 택했던 의사들이다. 이들이 지금의 의사를 대신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 의료 정책을 미래 세대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밀어붙이기 때문에 분노하고 좌절한다.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선 대통령이 젊은 의사와 의대생들에게 진정성을 담아 사과해야 한다. 여야의정 협의체든 뭐든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돌파구가 열린다.” ―의대 교수들도 제자들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의대 증원 수요 조사에서 각 대학이 써낸 숫자를 합하면 3401명이다. 대학의 증원 요청에 의대 학장들도 동원됐으니 학생들의 배신감이 클 것이다. 이제는 대학병원까지 망가지고 있다. 최근에 부산의 중학생 응급 환자가 대전 건양대까지 가서 수술을 받았다. 부산에 대학병원이 6개나 있는데…. 참담하고 부끄럽다.”이종태 KAMC 이사장(66)인제대 의대 명예교수. 예방의학 전문의, 의학교육 전문가로 인제대 의학교육실장과 학장을 역임하고, 40개 의대 학(원)장을 중심으로 전체 의대를 회원 기관으로 두고 있는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 교육이사와 정책연구소장을 지냈다. 올 8월 임기 2년의 KAMC 제9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