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욱

변영욱 기자

동아일보 사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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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변영욱 기자입니다.

cut@donga.com

취재분야

2024-12-17~2025-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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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위 주춤하자 초미세먼지 기승

    서울 초미세먼지 농도가 ‘나쁨’ 수준을 보인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 사거리 상공이 뿌옇게 흐리다. 이날 오후부터 북서쪽에서 찬 공기가 남하하면서 초미세먼지는 점차 걷힐 것으로 전망된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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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해는 꽃보다 더 활짝 피거라

    13일 서울시청 1층 로비에서 을사년 새해맞이 미디어아트 전시회 ‘미디어 풍광(風光): 찬란하고 조화로운’을 찾은 시민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이번 전시는 김혜경 작가의 개인전으로, 전통의 가치를 디지털 기술로 재창조한 미디어아트 작품 4점을 선보인다. 전시회는 3월 31일까지 열린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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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같은 장면, 다른 사진-대통령 관저 철조망 사진의 미묘한 차이[청계천 옆 사진관]

    2025년 1월 3일 새벽, 공수처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 영장을 집행하려 했습니다. 5시간 30분 만에 철수했지만, 속보를 따라 현장에 사진기자들도 망원렌즈를 들고 출동했습니다. 그다음 날부터 대통령 관저 주변은 일종의 숨바꼭질 무대가 되었습니다.1월 5일 일요일, 사진기자들과 방송 카메라맨들은 대통령 관저에서 약 1km 떨어진 남산 자락에 진을 쳤습니다. 완벽한 보안은 불가능했기에 나뭇가지 사이로 관저 입구를 일부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탄핵이 여름에 이뤄졌다면, 나뭇잎이 우거져 촬영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대치 상황이 뉴스 사진의 주제였던 첫째, 둘째 날과 달리, 셋째 날의 주요 피사체는 새로 설치된 철조망이었습니다. 담벼락을 따라 설치된 윤형 철조망은 망원렌즈로 잘 표현되지 않았지만, 쪽문 근처 도로를 가로질러 설치된 6~7미터 높이의 철조망은 바닥에 쌓인 흰 눈 덕분에 뚜렷이 보였습니다.이 사진을 처음 포착한 사람은 아마도 통신사 사진기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장에 있던 다른 사진기자들도 망원렌즈를 이리저리 돌리며 발견했거나, 누군가 집중해서 촬영하는 모습을 보고 렌즈를 돌려 담아냈을 것입니다. 사진기자들의 경쟁은 원죄와도 같습니다. 방송 영상도 마찬가지지만, 신문 사진의 경쟁은 특히 더 치열합니다. 이 경쟁은 100년 전에도 동일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슷해 보이는 사진인데 왜 하나만 찍고 나눠 쓰지 않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독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차별화된 기사와 사진을 제공하려는 노력 때문입니다.1925년 1월 5일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실린 사진도 얼핏 보면 같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사진입니다. 등장인물은 같으나 카메라의 위치가 미세하게 다릅니다. 동아일보는 정면에서, 조선일보는 약간 측면에서 촬영했습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각 신문사의 사진기자가 찍어 온 사진이기 때문입니다.당시 동아일보 기사 내용을 살펴보면, 같은 날 열빈루에서 재경 사회운동자 간친회가 열렸고, 1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회 운동의 현황과 기근 구제, 청년운동자 연령 제한, 운동선 통일 등의 결의문이 채택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사진 속 상황에 대한 기사를 보겠습니다. 1925년 1월 5일자 동아일보 지면입니다. 예정과 같이 그제 오후 6시 반부터 시내 열빈루 에서 재경 사회운동자 간친회를 개최하였다는 데, 김찬(金燦)씨 사회 아래에서 순서를 따라 회 의를 진행하여 과거 1년 간의 사회 운동을 여러 가지 방면으로 나누어 보고를 마친 후에 각 항의 토의를 마치고 아래와 같은 결의문을 작성한 후 에 재미스러운 여흥으로써 끝을 마치고 11시 반 경에 폐회하였다는데, 그날 밤에 출석한 인원은 150여 명의 다수에 달하였으며 그중에는 인천 과 충남 당진, 경북 예천 등지로부터 온 운동자도 15명이나 참가하였으며, 그날 밤의 대성황은 근래 드문 일이었다더라.결의문1. 기근에 대하여는 각자가 노력하여 조선 기근 구제회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후원할 일2. 두 총동맹 집회 금지에 대하여는 위원 3명을 선정하여 당국에 질문케 할 일위원 : 김찬(金燦), 김약수(金若水), 임세희(林世熙)3. 청년 운동자의 연령은 30세로 제한하기로 함4. 운동선의 통일을 각자가 적극적으로 노력할 일5. 운동 단체의 강령 문제에 대한 구체적 결의는 보류함사진기자들은 경쟁만 하는 직업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진기자들은 같은 현장에서 20~30년씩 얼굴을 마주하며, 때로는 협력도 합니다. 혼자 갈 수 없는 현장에 함께 요구해 들어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관계를 두고, 외국의 누군가는 ‘협력적 경쟁(coopetition)’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오늘은 100년 전 신문에 실린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두 장의 사진을 통해 사진기자들의 협력과 경쟁에 대해 이야기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차이를 발견하셨나요? 좋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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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서운 바람 불 땐 잠시 쉬어 가세요

    8일 오전 서울 성동구의 마을버스 정류장에 설치된 비닐 텐트형 추위 대피소 ‘온기누리소’에서 주민들이 추위를 피하고 있다. 성동구는 강력 한파에도 주민들이 안전하고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도록 41개의 온기누리소, 139개의 온열 의자, 48곳의 한파 쉼터 등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고 9일 밝혔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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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동노동자 위해 ‘찾아가는 쉼터’ 마련

    7일 서울 서초구 고속버스터미널 야외 주차장에 마련된 ‘찾아가는 이동노동자 쉼터’에서 배달 라이더들이 커피를 마시며 쉬고 있다. 서울시는 한파 속 야외에서 일하는 라이더들의 건강을 위해 이달 24일까지 여의도와 길동사거리 등 주요 업무 지역에 쉼터를 운영한다. 쉼터 정보는 서울노동권익센터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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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새해엔 금연을

    길고양이가 흡연 금지 입간판에 아예 등을 돌리고 있네요. “저도 담배 연기 싫어요. 2025년에는 꼭 금연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듯.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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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년 당신의 새해 인사는 얼마나 진심인가요?: 손글씨 연하장의 추억 [청계천 옆 사진관]

    ● 새해 인사, 어떤 이미지를 보내셨나요?여러분은 2025년 새해 인사를 전하면서 어떤 이미지를 함께 보내셨나요? 이모티콘, 해돋이 사진, 뱀 그림, 혹은 AI로 제작한 이미지를 사용하셨나요? 요즘은 보기 힘든 광경을 하나 소개합니다.지난주 퇴직을 앞둔 선배의 책상 위에 한 장의 연하장이 도착했습니다. 우편엽서 뒷면에 정성과 독창성이 담긴 붓글씨와 그림이 어우러진 연하장이었고, ‘을사년 첫날을 기념한다’는 인사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인스턴트식 새해 인사가 주류인 요즘, 400원이라고 인쇄된 엽서 가격과 직접 쓴 손글씨는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연하장은 저에게도 익숙한 인사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주로 선생님께 보내는 정도였죠. 1960년대생 선배들과 70년대생 X세대 사이를 가르는 상징 중 하나가 연하장이 아닐까 합니다. 크리스마스 카드는 익숙했지만, 연하장은 그렇지 않았죠. 1980년대 이후로는 더욱 낯선 단어일지도 모릅니다.그럼에도 여전히 연하장의 이미지는 새해 인사의 일부입니다. 문자 메시지에 첨부하는 산수화 느낌의 이미지나 십장생 그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문구가 들어간 이미지를 보내는 모습이 그 연장선입니다. 그러나 과거엔 이런 그림이 인쇄된 엽서나 8페이지짜리 편지로, 종이에 정성껏 손글씨를 써서 존경하는 분들에게 보내곤 했습니다.연하장은 우체국과 집배원을 거쳐야 전달되는 만큼, 12월 26~27일 즈음에는 미리 우체통에 넣어야 했습니다. 너무 이르지도 늦지도 않게, 적절한 타이밍을 맞추는 정성과 번거로움이 필요했던 인사법이었습니다. 때를 놓치면 새해 인사를 건네지 못한 셈이 되니까요.● 100년 전, 연하장 200만 장이 유통되었다고 합니다1925년 1월 2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당시 경성의 다섯 개 우체국에서만 하루에 160만 장의 연하장이 배달되었습니다.2백만의 연하장(年賀狀)어제 아침 첫 회 배달 양이부내 5국(局)에 165만 장어제 아침 첫 회 우편으로 시내 각처에 배달된 연하장의 총 숫자를 듣건데, 경성작일 아침 제 일회 우편으로 시내 각처에 배달된 연하장의 총 수효를 듣건데, 경성(京城)우편국에 84만, 광화문(光化門)에 41만1천5백14장, 남대문(南大門)에 39만, 서대문(西大門)에 8만2천4백35, 룡산(龍山)에 23만2천4백60장. 다섯 군데를 합하면 모두 1백6십3만2천4백60장이나 된다는데 이것도 어제 아침 첫 회로 배달한 것이므로 올해 경성 시내에 떨어질 연하장은 2백만장이 넘을 터이더라.연말까지 총 200만 장이 넘을 것이라 예측했죠. 1925년 한반도 인구가 약 1952만 명(출처: 국가통계포탈) 이었으니, 인구 10명 중 1명이 연하장을 보낸 셈입니다.집배원들은 평소의 몇 배나 되는 우편물을 배달하느라 고생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 모습이 담긴 사진은 오늘날엔 보기 힘든 장면이 되었습니다.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집배원 사진을 보며, 손편지로 전하던 따뜻한 새해 인사를 떠올려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오늘은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집배원 사진에서 지금은 사라지고 있는 연하장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동아일보 DB 사진 몇 장을 함께 소개해 드립니다. 독자 여러분! 근하신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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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ristmas 1924[청계천 옆 사진관]

    올해 크리스마스는 유난히 조용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저작권 문제로 거리는 물론이고 방송에서도 캐럴을 듣기 어려워졌고 특히 올해는 12·3 불법 계엄 선포와 12·14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까지 벌어지면서 사회 전체가 상당히 위축된 모습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서울 명동 입구 신세계백화점과 롯데백화점 외벽의 대형 미디어아트에서 그나마 축제와 송년의 기쁨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1924년 12월 2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크리스마스 축하 행사 사진입니다. 주일 학교에서 연극 공연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진이 실린 날짜 이외에 25일자와 26일자에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기사가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유래와 여러 가지 전설◇ 성탄절이란 무엇인가?12월 20일부터 25일까지를 성탄절이라 하며,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시기를 축하하기 위해 크게 준비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새해를 명절로 삼아 새 음식을 준비하고 새 옷을 입으며, 서로 새해 축복 인사를 나누고 예물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새해보다 성탄절을 더 성대한 명절로 여긴다.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들조차 이 절기를 하나의 명절로 즐긴다.◇ 성탄절의 의미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날을 축하하는 명절이다. 하지만 예수가 정확히 어느 날 태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생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이날에 가족과 친구들과 기쁨을 나누기를 바라지만, 예수는 자신이 태어난 날을 굳이 세상에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 결과, 예수가 태어난 정확한 날짜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존경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말했다.“우리가 어찌 그 거룩한 탄생을 기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그날을 알 수 없어도, 우리 마음과 정성을 다해 축복하자.”그리하여 예수 탄생 약 360년 후, 로마에서 12월 25일을 예수 탄생일로 정하고 축하식을 거행하기 시작했다.◇ 왜 12월 25일인가?12월 25일이 예수 탄생일로 정해진 데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옛날 성도들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날이 춘분 무렵이라 생각했다. 춘분은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시기다. 따라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날과 비슷한 날에 예수를 보내셨을 것이라 믿었다. 이를 바탕으로 마리아가 춘분에 예수를 잉태했다고 가정하면, 12월 25일이 열 달이 되는 날이므로 이 날을 탄생일로 본 것이다.또한, 12월 25일은 1년 중 가장 밤이 긴 날이다. 이때부터 태양이 다시 북쪽을 향해 빛을 내기 시작한다. 로마에서는 이를 축하하는 성대한 행사가 열렸는데, 기독교인들은 이 날이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로운 빛을 비춰주는 것을 상징한다고 여겼다.◇ 로마와 그리스의 차이로마에서는 12월 17일부터 23일까지도 성대한 축하 행사를 열었다. 예수 탄생일을 12월 25일로 정한 것도 이러한 로마의 전통적 축하 행사와 맞물렸다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희랍(그리스)교에서는 예수 탄생일을 1월 6일로 기념한다. 창세기 1장에서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다는 기록에 따라, 예수를 ‘새로운 아담’으로 보고 1월 6일을 성탄일로 삼았다.게재지: 동아일보게재일: 1925년 12월 24일, 석간1924년 12월 26일자 신문에 실린 “구세군과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걸인 수용소 설치”기사도 소개해 드립니다. ◇ 조선 전역은 농촌과 도시를 막론하고 극심한 생활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쓰러져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 쌓였고, 이는 매일같이 늘어만 갔다. 이대로라면 심각한 사회문제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현실을 직면한 부유층도 구제책 마련에 나섰으며, 그와 함께 외국인 선교사들도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서울에 머물던 외국인 선교사들은 날로 늘어나는 걸인과 고아들을 보며 인도적 차원에서 긴급히 구제를 시작해야 한다고 논의했다. 이 과정에서 스미스 목사를 비롯한 유지들이 협의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재작일(12월 24일) 오후 4시 30분, 서대문 밖 외국인학교에서 구빈상담회가 열렸다. 여기에는 서울에 있는 외국인과 조선인 목사들, 조선총독부 외사과장 대리 소덴(小田) 씨, 경찰부장 대리 삼천 경부(森川警部) 등 40여 명이 모였다.이날 회의에서는 첫 번째 조치로 고아와 걸인들을 수용할 시설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구체적으로 아래 세 곳을 임시 수용소로 정했다.죽첨정 구세군 본영낙원동 제2구세군영죽첨정 예배당더 나아가 1925년 1월부터는 서대문통 171번지의 민간 가옥 한 채를 매입해 영구적인 수용소를 설립할 계획도 논의되었다.이날 위원으로는 네 명이 선출되었다.구세군 서기관장 대좌 도원의군쓰 부인소전 외사과장대리오극선◇ 인도적 견지로, 자금은 본영에서여기에 대하여 구세군 본영에서 ‘도원의’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이 사업은 인도주의적으로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정성을 다해 착수할 예정입니다. 이 자금은 영국 런던 구세군 본영에서 지원받고, 우리들의 기부와 민간 회사의 후원을 통해 마련할 것입니다. 오늘 성탄절을 맞아 우리 본영에서는 빈민 1,000명에게 점심을 대접할 계획입니다. 대구에서도 200명을 대접하기로 했습니다. 조선의 기근은 한 국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를 널리 알려 본국에서도 동정을 구할 계획입니다.”게재지: 동아일보게재일: 1924년 12월 25일오늘은 100년 전 크리스마스의 풍경을 담은 사진을 시작으로, 그즈음 기사 두 건을 살펴 보았습니다. 두 건의 기사는, 성탄절이 종교적 축제의 의미를 넘어 당시 조선 사회가 직면했던 극심한 빈곤과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외국 선교사들과 구세군이 펼쳤던 인도주의적 노력을 생생히 전하고 있습니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길거리에서 생명을 잃는 이들이 늘어나던 암울한 현실 속에서, 이들의 구제 활동은 조선의 빈민들에게 작은 희망의 빛이 되어주었습니다.특히 구세군과 외국 선교사들의 노력은 단순한 시혜적 행위를 넘어 인도주의와 연대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로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빈곤과 불평등에 맞서 연대와 자비를 실천했던 당시의 구체적인 노력은 지금 우리가 마주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이러한 나눔과 실천에 있지 않을까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p.s. 1960년대~ 1980년대 서울의 크리스마스 풍경 사진 몇 장도 감상하시죠.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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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얼음나무

    얼음나무 얼음땡 놀이에선 땡! 하면 얼음이 풀리는데 진짜 언 나무들은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요? 날씨야, 도와줘∼ ―경기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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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도전, 인생샷

    즉석 사진기 안 두 사람, 아주 제대로 표정 잡고 있겠죠? 먼 훗날 인생샷으로 남을지도 모르니까요.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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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년 전 만평, 사진으로는 담지 못한 진주 시위대의 목소리[청계천 옆 사진관]

    1924년 12월 9일자 동아만평에 “이야 어쨌든지”라는 만평이 실렸습니다. ‘도청’이라는 글자가 써진 집 왼쪽에 진주라는 한자와 사람이 보이고 오른쪽에는 부산이라는 글자 위에 여러 사람이 있습니다. 그림만 보아서는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그 시대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습니다.그러다 12월 16일자에 실린 기사와 사진을 보고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진주에서 특파원 김동진이 보낸 기사를 보니 비로소 만평의 의미가 이해됩니다. 진주시에 있던 경남도청을 부산으로 옮기려고 하자 진주시에서 큰 시위가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1924년 12월 16일자 기사입니다. 和田知事急遽上京漸次擴大되는慶南道廳移轉反對날로 격렬해지는 도청 이전 반대 운동총독 초전에 의해 화전 지사 급히 상경◇晋州에서 特派員 金東進 發電13일 오후, 시위운동대는 부산 방면과의 교통을 차단하기 위해 남선교(南船橋)를 파괴하려는 계획으로 행렬을 지어 이동했다. 그러나 이를 경비하던 경찰에 의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방향을 돌려 면(面) 사무소로 향했다. 면사무소에 도착하니, 소원(小員)들이 모두 사직서를 제출하여 단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시위대는 이에 환호성을 지르며 군청으로 이동하여, 직원들에게 사직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직원들은 관리 신분상 사직은 어렵고, 휴직은 고려하겠다는 답변을 내놓았다.이후, 시위대는 다시 도청으로 몰려들었으나, 경찰들이 문을 굳게 닫고 응대하지 않아 일시적인 혼란이 발생했다. 더는 돌파구를 찾지 못한 시위대는 화전 지사 관저로 몰려가 오후 4시까지 지사와의 교섭 결과를 기다렸다. 마침내 지사는 “즉시 상경하여 가능한 한 시민의 충의를 전달하겠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지사의 답변이 미흡하다며 함성을 질렀으나, 위원들의 중재로 진정되었다.그 후 시위대는 비상종(非常鐘)을 울리며 공원으로 이동해 위원장의 보고를 들었다. 이들은 도청 이전이 예정된 내년 4월까지 반대 운동을 지속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진주좌(晋州座)로 향해 연설회를 개최하며 부산일보, 경성일보, 매일신보 등의 신문을 보지 않기로 결의한 후, 밤 8시부터는 달빛을 등지고 시위 행렬을 이어갔다. 화전 도지사는 형세가 점점 험악해짐에 따라 총독의 초전에 의해 14일 오전 1시 급히 상경하게 되었다.◇食糧供給을拒絶부산으로 가는 물건은 취급하지 않는다진주시민회는 매일 평균 550석가량의 백미를 부산 시민에게 공급해왔으나, 13일부터 이를 중단하기로 결의했다. 또한, 운수조합과 노동공제회 역시 부산으로 가는 화물의 운송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상인단도 부산과의 거래를 전면 중단하기로 하였다.평소 진주 장날의 거래액은 평균 17만 원이었고, 연말에는 20만 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13일 장날에는 모든 거래가 중단되고 시민들은 도청 이전 반대 운동에만 열중하였다.◇差別이 可痛부산이 조선인의 도시라면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다부위원장 김갑순(金甲淳)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우리의 운동은 단지 생계 문제 때문이 아닙니다. 조선인을 차별하는 데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만약 부산이 조선인이 주도하는 곳이라면 이렇게까지 반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상황이 나빠지면 떠나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조상이 물려준 이곳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도청 이전이 현실화된다면 진주에 300가구를 수용할 시설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日本人團을 勸誘조선인이 주도하는 운동에 참여하지 말라고진주 경찰 당국은 일본인 간부들에게 조선인이 주도하는 이번 운동에 공조하지 말 것을 권유했으나, 그들은 이를 무시했다는 소문이 있다.◇繼續되는 赤旗 示威붉은 깃발을 들고 계속되는 시위14일 오후에도 시위대는 붉은 깃발을 들고 시위를 이어갔다. 깃발에는 “혈성대(血誠隊)”, “세금불납동맹(稅金不納同盟)” 등 여러 문구가 적혀 있었다. 시위대는 남강 다리로 몰려나갔으나, 화물 운송은 전면 중단되어 시가는 죽은 듯한 정적 속에서 시위 행렬만 이어졌다.◇無可奈何내무부장의 말시도 내무부장은 “시민들에게 동정은 하나, 이미 결정된 일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 “다른 대책을 고려 중”이라며 시민을 위로했으나, 구체적인 방안은 언급하지 않았다.◇馬山도 決死的 反對시민대회를 열고 반대 결의마산(馬山)에서도 도청 이전 반대 운동이 진행되었다. 13일 시민대회에서 “도민 다수의 복리를 무시한 도청 이전은 결사적으로 반대해야 한다”는 결의가 채택되었고, 이후 마산 시내 곳곳에 전단이 배포되었다.13일 오후 2시, 신마산소학교에서 열린 대회에서는 수백 명이 결사 반대를 외치며 열띤 연설을 이어갔다. 이어 오후 4시에 열린 제2차 대회에서는 실행위원을 선출하고 결의문을 채택한 후 폐회하였다.● 사진의 한계, 만평의 역할신문의 만평은 단순히 웃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대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통찰과 비판의 도구였으며, 대중에게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력한 매개체였습니다. 이번 ‘백년사진’에서 소개한 1924년 진주 도청 이전 반대 운동과 관련된 만평도 그러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예라 할 수 있습니다.진주 시민들의 격렬한 반대 운동을 담은 기사와 사진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생생한 사회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었지만, 만평은 그것과는 또 다른 층위에서 의미를 전달합니다. 사진은 사실 그대로의 모습을 담아내지만, 만평은 그 안에 해학과 풍자를 담아 독자들의 이해와 공감을 이끌어냅니다. 사진이 때로는 사실을 과감히 드러내기보다는 관조적으로 전달할 여지를 남겨둔다면, 만평은 메시지가 명확하지 않으면 존재 의의를 잃게 됩니다. 그 선명함은 필연적으로 권력과 충돌을 불러일으켰고, 만평이 가진 ‘매운 맛’은 그래서 더욱 강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15년 프랑스의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의 편집국에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총을 들고 난입해 4명의 만화가를 포함해 12명을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평소 이슬람을 풍자하는 만평을 많이 실은 것에 대한 보복 테러라는 분석이 많았습니다. 동아일보의 경우, 창간호부터 만화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창간호에서는 ‘동아일보’란 글자가 박힌 수건을 허리에 두른 어린이가 까치발로 곧추 서서 손을 위로 뻗어 ‘단군유지(檀君遺趾)’라는 휘호가 쓰인 액자를 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외세에 지배당한 시대지만, 단군의 뜻을 이어받아 민족 독립을 이루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어린이 모습을 통해 표현했다는 평가입니다. 이후에도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이슈를 풍자하며 대중의 목소리를 대변했습니다. 만평은 일제 강점기의 억압 속에서도, 해방 이후의 혼란기와 한국전쟁, 군사 독재 시절을 거치면서도 대중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달하고, 때로는 권력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이어갔습니다. 이는 단순히 언론의 부속물이 아니라, 시대적 흐름을 포착하는 또 하나의 역사적 기록이었습니다.오늘날 만평은 과거처럼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정치적 이념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사회에서 만평의 선명한 메시지는 자칫 특정 진영의 공격을 받을 위험에 노출되며, 작가와 편집자가 스스로 검열하게 되는 환경을 만들기도 합니다. 2009년 동아일보 창간 85주년 특집 기사에서 만화평론가 손상익 박사가 “신문이 열 냥이면 만평은 아홉 냥”이라고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억압적이고 암울했던 시대, 언론이 수행했던 역할과 그 안에서 만평이 가졌던 비중을 잘 드러낸 표현이라 하겠습니다.1924년 진주 도청 이전 반대 운동을 다룬 만평을 통해 우리는 백 년 전의 사회적 갈등과 대중의 목소리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사진과 만평, 각각이 가진 기록의 방식과 특성은 다르지만, 모두가 시대를 반영하고 후대에 역사를 전달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오늘은 백년 전 사회적 이슈를 다룬 만평을 보면서, 사진과는 다른 기록으로서 만평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를 생각해보며,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궁금합니다. 사진과 만평 중 여러분은 어느 쪽이 더 시대를 잘 반영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여러분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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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가족의 행복한 추억이 작품으로

    13일 오전 서울 동작구청 1층 로비에 ‘아이좋아 아이신나 가족사진 공모전’ 수상작이 전시돼 있다. 동작구청은 지난달 결혼과 출산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확산하기 위해 가족사진 공모전을 열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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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2025년은 사다리 타듯

    2025년은 사다리 타듯 거리 크리스마스 장식을 위해 모인 사다리들 보니 바야흐로 연말이군요. 새해엔 우리 모두의 기운도 사다리 오르듯 상승하길요. ―서울 마포구 동교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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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석기 인류의 모습은?

    13일 서울 송파구 서울백제어린이박물관에서 관람객이 영국 스톤헨지를 만드는 신석기 인류를 표현한 미니어처를 관람하고 있다. ‘선사 시대로의 소소한 탐험’ 전시회 특별전은 내년 2월 2일까지 열린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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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도 피의자와 함께 등장한 경찰 – 경찰의 초상권, 보호해야 할까?[청계천 옆 사진관]

    1924년 12월 8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한 장의 사진.앞줄에 숫자가 표시된 5명의 인물은 강도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상해 임시정부에서 왔다”고 주장하며 부자들을 협박해 돈을 빼앗았다고 합니다. 뒷줄에 서 있는 사람들은 용산경찰서 소속 경찰들로 추정됩니다. 범인과 경찰이 함께 한 사진을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굉장히 어색합니다. 오늘날에는 피의자의 얼굴은 모자이크로 가리고, 경찰은 잘 등장하지도 않으니까요.기사를 살펴보겠습니다. ◇ 지난 5일부터 7일까지 삼일간 오명 피체(三日間五名被捉)지난달 11일, 고 양군 룡강면 창전리(高陽郡龍江面倉前里) 재산가 이덕규(李德圭)의 집에 침입했던 강도 사건을 비롯하여 창전리 전당포에 세 차례나 침입, 흉기를 들고 “상해 임시정부에서 왔다”고 위협하며 금품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한 이래, 용산경찰서는 주야로 각 방면에서 수색을 계속하였다.피해지를 중심으로 틈 없이 수색한 끝에, 용산 관내 본적을 두고 수년 전부터 집을 떠나 행방불명이 된 강절도 전과범 김개룡(金開龍)(31)이 주요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경찰은 그의 소재를 추적하던 중 지난 5일 광주군(廣州郡) 방면에 숨어 있는 흔적을 발견하였다. 이에 전(田), 민(閔), 화산(花山) 세 형사가 광주군으로 추격했으나, 김개룡이 이미 서울로 잠입한 뒤임을 확인하고 다시 추적을 이어갔다.그 과정에서 공범인 김참석(金昌錫)(27)을 6일 오후 7시, 종로 오정목 45번지의 음식점에서 전 형사가 체포하였다. 이어 엄중히 취조한 결과, 또 다른 공범인 박황윤(朴黃潤)(29)을 종로 오정목에서 체포하였다. 이후 형사들을 추가로 파견하여 7일 오전 6시, 부내 광희정(光熙町) 1정목의 술집에서 강도단의 단장 김개룡을 포함한 공범 김창성(金昌成), 김점동(金点童) 등 세 명을 검거하였다. 이 과정에서 활동사진과 같은 격투가 벌어졌으나 결국 전원을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전후 범행 13건용산, 북미창정(北米倉町), 뚝섬(纛島) 등을 포함하여 이들의 범행은 총 13건으로 판명되었다.◇ 전과 4~5범 흉악 강도단검거된 5명을 엄중히 취조한 결과, 이들은 모두 강절도 전과범으로 춘천형무소(春川刑務所)에서 출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임이 밝혀졌다. 또한 창전리(倉前里) 사건을 비롯하여 북미창정 전당포와 뚝섬 등지에서 총 13건의 범죄를 저질렀음을 자백하였다.검거된 강도단원의 신상은 아래와 같다.김은복(金銀福)(29): 전과 4범, 고양군 숭인면 안감리(高陽郡崇仁面安甘里).박황윤(朴黃潤)(29): 전과 3범, 시흥군 신북면 동동리(始興郡新北面東洞里).김개룡(金開龍)(31): 전과 5범, 고양군 룡강면 율도(高陽郡龍江面栗島).김점동(金点童)(23): 전과 4범, 주소 미상.임창성(林昌成)(38): 전과 4범, 경성부 광희정(京城府光熙町).● 범죄자 공개 방식의 변화 100년 전에는 경찰과 피의자를 함께 사진에 담아 시민들에게 공개하는 것이 흔했습니다. 경찰로서는 “우리가 일을 잘 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홍보 방식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다릅니다. 2024년 상황을 보자면, 피의자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하고, 경찰은 카메라에 잘 등장하지 않습니다. 특히 경찰 수뇌부가 피의자와 함께 있는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이처럼 시대에 따라 범죄자 공개 방식도 달라졌습니다. 현재는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규제가 강화되었고, 경찰의 노출도 줄어든 상황입니다.● 경찰은 초상권이 있을까? 100년 전 강도 피의자들을 전리품처럼 소개하며 포즈를 취하는 경찰 사진을 보면서 공직자의 초상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즘 경찰들이라면 절대 저런 방식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가 있습니다.2016년, 한 경찰대 학생이 저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피의자를 호송할 때 경찰의 얼굴이 언론에 그대로 노출되는 건 문제가 있지 않나요?”그 학생은 경찰의 얼굴이 노출되면 나중에 흉악범들에게 보복을 당할 위험이 있고, 사생활이 침해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당시 저는 전화를 통해 이렇게 답했습니다. “경찰까지 모자이크 처리하면 시민들이 불안감을 느끼지 않겠어요? 공권력을 행사하는 경찰이 두려움을 보이면 안 되죠.” 그렇게 답을 드리긴 했지만 사실 이 문제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경찰로서 얼굴이 공개되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그 업무를 사전에 조정하거나 배제하는 것도 방법일 것입니다. ● 초상권에 대한 내 생각저는 당시 경찰의 초상권 문제에 대해 몇 가지 의견을 정리해 보았습니다.1. 경찰은 공적 인물이다.경찰은 국민의 세금으로 일하는 공무원이기 때문에 공적인 활동은 투명하게 드러나야 한다.2. 공권력은 두려움을 보여선 안 된다.범죄자들의 보복 우려를 이유로 경찰을 가리는 것은 시민들에게 공포감을 줄 수 있다.3. 문제가 있다면 사전 조치가 가능하다.호송 업무가 부담스럽다면, 사전에 요청해 배제되는 것이 맞다.경찰의 활동 모습은 단순히 범죄자를 호송하는 장면을 넘어, 국민들에게 신뢰를 주는 중요한 역할도 합니다.100년 전 강도 사건 사진은 당시와 지금의 경찰 활동 방식을 비교해보게 합니다. 이 사진은 단순한 흑백 기록을 넘어 초상권 문제, 공권력의 역할, 언론의 윤리 등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범죄자와 경찰 모두가 카메라 앞에 서 있는 모습,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진을 보시고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댓글로 의견을 나눠주세요!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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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까치를 향해 경계경보

    옛 관공서 옥상에 확성기가 건재하군요. 열매를 물고 날아가는 까치에게 경보를 날릴 듯합니다. “에엥∼.”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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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라 지킨 희생 잊지 않겠습니다” 6·25전사자 봉안식

    12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2024년 6·25전사자 발굴유해 합동봉안식에서 국군 장병들이 영현 봉송을 하고 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이날 추모식에 참석해 “포성이 멈춘 지 7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수많은 참전용사들이 전국 이름 모를 산야에 잠들어 계신다”며 “정부는 마지막 한 분까지 가족의 품으로 모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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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루돌프 대신 멍돌프

    루돌프 대신 산타 할아버지 모십니다. 검고 큰 체구 탓에 겁내는 분들이 많았는데 산타 장식 옷을 입은 후 인기가 늘었다네요. ―경기 군포시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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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쇠락한 권력은 어떻게 기록되는가 … 100년 전 권력의 몰락을 담은 사진과 그 의미 [청계천 옆 사진관]

    ● 쇠락한 권력에 대한 기록가구와 도자기 등이 길거리에 무질서하게 쌓여 있습니다. 주변에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값비싸 보이는 세간살이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50명 가까운 인파입니다. 경매처럼 앞에 있는 장삿꾼이 물건을 파는 모습입니다. 어느 쇠락한 권세가의 집 물건이라네요. 숙종의 장인 민유중(려양부원군)의 후손들이 살던 집, 죽동궁이 쇠락의 끝을 맞이했습니다. 가문의 상속자인 민정식이 집안 재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결국 상해로 몸을 피한 뒤, 집은 몇 달째 버려진 상태였습니다.결국 이틀 전부터 죽동궁의 창고에 쌓여 있던 세간들이 하나둘 큰 길가로 끌려 나와 경매로 처분되기 시작했습니다. 죽동궁은 결국 젓가락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가문의 영광이 몰락한 모습을 보며 회한과 비통함을 느꼈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1924년 12월 5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사진입니다.무슨 사연인지 기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창피막심한 죽동궁(竹洞宮)의 말로(末路)돈 때가 묻은 가가지 세간 한길가에서 싸구려 신세로◇ 한창 세도가 당당하던 숙종대왕의 장인 려양부원군 민유중 공의 가통도 분명치 못한 상속자 민정식 대에 이르러 난마같은 집안은 나날이 쇠하여 들어가다가 수십만의 재산을 가지고도 맘대로 하지를 못하고◇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다가 필경에는 몸을 피하야 상해(上海)로 달아나서 그나마 죽동궁(竹東宮)이라던 대문조차 영구하다 더 버리게 된 지가 이래 몇 달이 되었던 바 재작일부터 그 집안 창고에 깊이 쌓여 있던 역대 손손히 내려오던 구하기 드문 가장 집물이며 주인이 친히 쓰던 탁자와 상이며 안주인이 입던 명주 비단 옷가지를 산산히 끄어내여 죽동궁 앞 넒은 마당에서 『십원이오 십원 십원 십원 오십전이오 자』소리를 치며 경매를 하게 되엿는데 부러진 상다리 깨어진 솥두껑, 동 녹 쓴 침상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회구의 감에 느끼게 하였으며 이끼 돋은 기와장에 『동민회』(同民會) 라고 쓴 흰 간판이 갈린 죽동궁은 옛날 듣고 지금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비창한 느낌을 주었는데 이로써 말썽 많던 죽동궁은 젓가락하나 남지 않고 망해 버린다더라.● 화무십일홍…세간살이의 입장에서 본 권력의 쇠락 사진이 실린 다음 날인 1924년 12월 6일자 동아일보는 가구와 접시 등 물건들의 입장에서 권력의 쇠락을 바라보는 글을 게재했습니다. 기사라고 하긴 어색한 형식이지만 100년 전 신문이 권력의 무상함을 특이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래 내용입니다.〈죽동궁 민정식 씨의 몰락과 세간의 하소연 -몰락한 죽동궁의 주인〉“열흘 붉은 꽃 없고 십 년 세도 없다”는 속담이 죽동궁 민정식 씨의 집에 딱 들어맞는다. 그는 아내 이봉완 씨에게 휘둘리고 처가와 삼촌들, 그리고 채권자들에 시달리다 결국 죽동궁을 떠나 상하이로 몸을 피했다. 현재 그는 낯선 땅에서 눈물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죽동궁처럼 웅장했던 집은 이미 민영휘 씨의 소유로 넘어갔고, 남은 재산 역시 팔려나가고 있다. 집 안의 세간살이들마저 일본인 변호사에게 맡겨져 길거리 고물상에서 팔리는 신세가 되었다.◇세간들의 하소연민정식 씨 집안에서 대대로 사용되던 세간들은 이제 주인을 잃고 낯선 손으로 넘어가고 있다. 이 물건들은 자신들이 겪는 처지를 이렇게 한탄한다.◇배가 고픈 두 주전자 이야기과거 민정식 집안의 식량을 책임졌던 두 주전자는 이렇게 말했다.“우리는 이 집 대청 구석에서 수백 명의 식구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그 덕분에 한때 배고픔을 몰랐지만, 요즘은 우리 안이 텅 비어 배가 고픕니다. 결국 경매장으로 끌려가서 깨지고 망가져 이제 쓸모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꽃 같은 시절을 그리워하는 접시“나는 선대감의 특별 주문으로 영국에서 건너온 최고급 접시였습니다. 산해진미를 담으며 연회와 식탁을 빛내던 날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깨지고 금이 가 병신이 되었습니다. 조선까지 와서 이렇게 비참해질 줄은 몰랐습니다.”◇비단옷이 담겼던 장농의 한탄“내 몸엔 대방마님이 시집올 때 가져온 비단옷들이 차곡차곡 쌓였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옷들은 하나둘 팔려 나갔고, 끝내 쥐들이 내 몸을 갉아먹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지금은 경매장 구석에서 나뒹굴며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습니다.”◇옛 영광을 잃은 침대“내 몸 위에는 한때 주인 부부가 편안히 잠들었고, 마마님들도 자주 쉬어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도금이 벗겨지고 똥칠까지 당해 비참한 모습이 되었습니다.”이처럼 민정식 씨의 몰락과 함께 세간살이들도 주인을 잃고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고 있다. 한때 영광을 누리던 물건들이 몰락한 집안의 운명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후일담신문사 사진기자를 하면서 패배자를 카메라로 찍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렇지만 찍는다고 그 사진을 승리자보다 크게 쓰거나 많이 쓰지는 않습니다. 가령 박빙의 승부 끝에 선거에서 당선된 후보자의 얼굴은 크게 쓰지만 패배하고 눈물을 훔치는 모습은 그다지 크게 쓰지 않습니다. 넘지 말아야할 선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에 크게 사진이 실린다면 그 패배자에 대한 신문의 평가가 아주 박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1924년 12월 5일 동아일보 2면에 실린 두 장의 사진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사진입니다. 그만큼 사회적으로 지탄받은 인물의 말로를 보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진기자로 최근 우리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법 계엄’의 후폭풍에 대해 느낀 점 몇 가지를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다음 날 새벽 지방 출장을 위해 집에서 쉬고 있던 중 우연히 YTN을 통해 윤석열 대통령의 기자회견과 막바지에 들린 ‘계엄’이라는 단어를 들었습니다. 많은 분들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심정으로 TV와 유튜브의 채널을 옮겨가며 현장을 계속 지켜보았습니다. 계엄은 선언되었지만 기자들과 시민들의 카메라는 계속 돌아갔고 시민들에게 실시간으로 현장 화면이 중계되었습니다. ‘중과부적’이라는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탄식은 사진기자인 저에게는 이미지 전쟁에서 실패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 같았습니다. 변화된 세상에 대한 이해와 준비없이 막연히 통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1980년대 운동권이었던 지금의 586들의 ‘국회 담넘기’ 이미지는 지지자들 사이에서 SNS를 통해 퍼지면서 저항과 연대가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기 시작했지만, 국민의 세금으로 첨단 장비를 지급받은 군인들이 국회의사당으로 들어가는 이미지는 보수층 사이에서도 지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1980년 전두환 세력의 계엄을 경험했던 우리 사회는 인터넷이라는 기술 발전을 계기로 세상에 소식을 알릴 수 있는 채널을 다양하게 준비해 왔습니다. 게다가 카메라에 익숙하고 카메라에 찍혀 역사에 남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는 젊은 군인들에게도 현장의 실시간 중계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은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고 시민들에게 총을 겨누지 않았습니다. 5일 저녁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학생총회 취재를 다녀왔습니다. 대통령의 후배인 대학생들은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은 엄청나게 절차와 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총회가 열리는 학생회관 앞 계단광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바일 신분증으로 일일이 확인을 해야 했고, 타학교 학생이나 일반 시민들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100% 서울대 학생들의 모임이고 그들의 결의라는 명분을 갖추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덕분에 5시에 행사 시작할 것으로 예상하고 취재를 나섰던 저는 행사가 시작되는 8시 30분까지 신분 확인하는 절차를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본 행사가 시작되었을 때도 과거와 다른 집회 모습이었습니다. 일사분란한 8자 구호는 없었습니다. 손을 들어 동시에 하늘로 향하는, 사진기자에게는 필수적인 ‘결정적 순간’도 별로 없었습니다. 권위주의 시대의 데모 모습과는 현저하게 달랐습니다. 짧은 시간에 거리를 장악하고 시민들에게 세를 보여줘야만했던 시대와 달리 지금은 조근조근 자신의 입장을 표현하는 학생들의 연설이 이어졌습니다. 사진기자로서는 상당히 지루한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신문에 쓸 한 장의 사진을 찍는데 총 4시간이 걸렸습니다. 속도보다는 올바름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의 모습에서 우리 사회가 변한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점에서 맥락이나 설명 없이 3일 밤 TV에서 들었던, 계엄군의 ‘처단’이라는 단어는 참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왜’가 빠진 공권력의 공격 앞에서 개인적으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절차의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40년 전과 같은 ‘상명하복’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사회로 우리 사회가 성숙했고 그만큼 복잡하기 때문일 겁니다. 오늘은 100년 전 어느 세도가의 몰락을 명확하게 기록해 놓은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100년이 지난 오늘과 내일 신문은 어떤 사진으로 권력을 기록하게 될지 그리고 그 기록들이 나중에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두려우면서도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느껴지시나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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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크리스마스트리의 가시

    장미의 가시 같은 경고일까요?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 불을 밝힐 전선에 감전주의 안내판이 붙어 있네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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